나의 어머니
상태바
나의 어머니
  • 김정범 내북면 노인회장
  • 승인 2012.09.06 12: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내가 닭장 지붕위에 맺혀 있는 호박을 따 달라고 한다. 조그만 사다리를 놓고 올라서 보니 두 주먹을 모은 것 보다 조금 큰 애호박 하나가 지난밤에 내린 비에 젖어 윤기가 흐르고 있다. 그대로 따버리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에서 잠시 멈칫하다가 손을 내밀어 따려는 순간 옛 생각이 나를 또 다시 그 분을 향한 그리움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지금부터 60년이 지난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11살 되던 해 둘째 큰아버지 회갑 날이었다. 큰아버지께서는 한 마을에 사셨으므로 그 날 우리가족 모두는 하루 종일 큰댁에 있게 되었고 저녁 때 집에 오는 길목 어느 집 울타리에 애호박 하나가 예쁘게 달려 있어 아무 생각 없이 그 것을 따가지고 집에 와 마루 기둥 옆에 놓아두었는데 얼마 후 어머니께서 오셔서 호박을 보시고는 대뜸 어디서 난 것이냐고 막내 누님에게 물으신다. 내가 가지고 온 것이라고 누님이 대답하자 어머니께서는 아무개네 집에서 따가지고 온 것이 아니냐고 다그치시기에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어머니께서는 안방 선반 위에 있는 회초리를 가지고 오셔서 (선반에는 언제나 회초리가 있었다) 나에게 호박을 들게 하여 앞장을 세우시고는 그 집으로 가셔서 호박 도둑을 데려왔으니 야단을 치라고 이르시고는 나에게 잘못을 빌고 호박을 드리라고 하신다. 나는 잘못했노라고 용서를 빌며 호박을 드렸더니 그 집 할머니께서는 어린애가 아무 것도 모르고 한 것을 무얼 그러느냐고 하시며 웃으셨지만 어머니의 화나신 모습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서 종아리를 몇 대 맞고서 우는 나를 누님이 데려가 달래 주었는데 매를 맞으면서도 그 때 어린 내 머리 속에서는 어머니께서 어떻게 아셨을까? 그것이 궁금하였는데 그 궁금증은 곧바로 풀리게 되었다. 누님이 나를 달래놓고는 어머니께 호박이 그 집 것 인줄을 어떻게 아셨느냐고 묻자 그제야 어머니께서 웃으시며 그 집 앞을 지나오는데 그 집 할머니께서 혼자 말로 고약해라 고약해라 하시기에 무엇이 그리 고약하냐고 물으셨더니 그 할머니 대답이 저녁을 먹으려고 손국수를 썰어 놓고 호박 채를 만들려고 따러 왔더니 없어 졌다고 하셔서 그냥 예사롭게 생각 하셨는데 집에 와 보니 호박이 있어 직감 하셨다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왜 하필 어머니와 그 집 할머니가 만나게 되어 매를 맞았나 하고 야속 하게 생각 하였으나 지금도 생각 해 보면 그 것은 내게 큰 교훈을 준 아주 고마운 사건이었다. 나는 그 때부터 지금 까지 내 것과 남의 것을 분명히 구분 할 줄 알게 되었고 그리고 내 것이 아닌 것을 절대로 욕심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평생 좌우명처럼 여기며 살아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어머니께서는 우리 형제들이 실수가 아닌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결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그에 대한 벌을 반드시 내리셨는데 모면하려고 피하거나 도망을 가면 후에 더 큰 벌을 받았음으로 결코 그럴 수도 없었다.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나의 어머니께서도 자녀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 하신 여인이셨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이미 뻬쪽구두(하이힐)를 신으셨을 만큼 당시에는 신여성으로 교회 전도사로 목회생활을 하셨으나 아버지와 결혼 하신 후로는 평생을 자녀와 가정에 헌신하시며 누구와 다름없는 시골 여인으로 사시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늘 어머니께 미안 해 하셨고 장롱 속에는 당시 세루라고 하는 좋은 옷이 몇 벌 있었어도 나는 어머니께서 그 옷을 입으신 것을 본 것은 군산에 있던 외삼촌댁에 가실 때의 몇 번이 전부인데 그 외에는 언제나 손수 무명이나 베를 짜서 옷을 해 입으셨기에 지극히 평범한 촌부의 모습이었으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그러기에 나의 어머니는 여성스럽다 기보다는 강직한 어머니요 정갈한 여인으로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정작 늙으셔서는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에게 몹쓸 짐을 지우게 되면 어쩌느냐고 하시며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가셔서 편히 가게 해 달라고 기도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음이지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꼭 이십일 만에 갑자기 쓰러져 3일간 혼수상태로 계시다가 따사로운 이른 봄 햇살이 산마루를 넘으려 할 때 구름 사이에서 손짓하는 천사를 따라가셨는데 영혼은 이미 하늘나라에 다다른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때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다만 그 자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를 너무 사랑 하셔서 따라 가셨다고 하기도 하고 아버지께서 데려 가셨다고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제 돌아가신지 이십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도 불효만 한 것 같은 죄스러운 마음에 그 분에 대한 그리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