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 전투를 치룬 경주김씨 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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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전투를 치룬 경주김씨 세거지
  • 보은신문
  • 승인 1999.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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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장안마을 폐허로 변해 찾아온 곳 북실마을"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남북접 연합 농민군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전라도 남부지역으로 밀려서 내려가던 북접 농민군은 손병희의 지휘 아래 순창에서 재집결하게 되었다. 충청도와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온 사람들로 편성된 북접 농민군은 교주 최시형과 합류해 충청도로 다시 북상하기 시작했으며, 관군과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평야지대를 피하고 소백산맥의 산줄기를 타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북접농민군은 북상하면서 수차례 걸쳐 관군과 일본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고 영동, 청산, 보은 등지에 도착했을 때는 농민군측이 불리하게 되었으며, 북상한 농민군은 4~5천명 정도였으며 누적된 피로와 겨울 날씨로 인해 추위와 배고픔과의 싸움을 함께 겪어야 했다. 농민군이 영동에 도착했을때 청주병영의 관군과 옥천의 민보군이 진을 치고 북상을 저지하고 있었으며, 영동 용산에서 북접농민군과 급기야 전투를 벌렸다.

전투는 12월 11일과 12일 이틀간 치열하게 계속되었고 전투가 계속되었고 전투가 계속될수록 관군의 사기는 떨어지고 있었지만 일본군의 합류로 농민군의 위력은 중과부적에 이르렀다. 머나먼 길을 행군해서 마로면 관기를 거쳐 장안마을에 도착한 북접 농민군은 동학교단의 도소가 정해진 이후 전국의 동학 도인들이 성지처럼 가족들을 이끌고 들어왔던 장안마을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4백채의 초막과 도소로 쓰였던 큰 기와집은 물론 마을전체가 불살라져 있는 처참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최종 목적지였던 장안마을에 돌아와 보니 모든 것이 허망했던 나머지 일부 농민군은 보은 읍내로 직접 들어가 관군이 동학 거점을 파괴한 앙갚음으로 관아 건물의 문짝을 부셔 버리고 이민의 집에 불을 질러 재산을 탈취하는 등 한바탕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원남에서 보은읍으로 진입한 농민군과 장안에서 넘어온 농민군은 지금의 종곡리 입구인 풍취점에서 합류하게 되었다.

풍취점에서 합류한 농민군은 북실로 진입하게 되었고 북접 농민군의 전투다운 최후의 전투를 북실에서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북실마을은 지금 종곡리를 비롯 성족, 누청, 강신 일대를 말하며 안북실과 바깥북실로 지칭하고 경주김씨의 대표적인 세거지였다. 마을 위쪽에는 마치 종처럼 생긴 작은 산이 아름답게 솟아 있으며, 이 산 때문에 마을이름이 북실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마을을 둘러싼 지형은 분지와 같은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북실마을은 속리산에서 뻗어오는 큰 산줄기가 북실을 감싸안고 있으며, 마을 앞쪽에는 낮은 봉우리가 연이어 있는 야산이 있어 북접농민군이 주둔하기에 적지였을 것이다. 농민군이 몰려오는 사실을 알게된 마을 사람들의 일부는 농민군과 함께 가세하기도 했으며,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다른 동네로 도피하거나 숨게되어 농민군이 온통 차지하고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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