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에 몸담고 살아온 자선·봉사인생 후회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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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에 몸담고 살아온 자선·봉사인생 후회 없어
  • 천성남 기자
  • 승인 2011.11.03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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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박광희(80) 보은자동차공업사 회장
 
자선이란 일반적으로 종교적, 윤리적 동기에 의해 불쌍히 여기거나 이웃 애, 또는 은혜 등을 총칭하는 것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베푸는 자와 받는 자와는 자타불이라고 하는 평등관계에 있다고 한다. 조상대대로 이어받은 불심(佛心)을 토대로 20대 후반 공무원에 입문하면서 시작된 자선심은 질기고 혹독했던 가난을 벗은 후에도 가난 속에 허덕이던 지역사회의 고학생과 소년소녀가장 등 절박했던 그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남몰래 자선을 베풀어 든든한 후광이 되어준 박광희 회장(80·보은자동차공업사 보은읍 이평리76-20)을 만났다. 〈편집자 주〉

▲ ◇경력·훈 포장보은군청근무(1960. 4. 30)보은군 과수협회장(1984. 6. 8 ~1992. 12. 30)보은군 위민봉사행정담당관(1992. 6.)법무부보은군보호갱생보호의원(1991. 9. 30)보은공업사고문(2004년~현) 훈포장보은군수공로표창 (529호)충북도지사저축표창 (296호)충북농촌진흥원 소득유통증대개선 (275호)충북도지사도정시책발전유공표창법무부장관 범죄예방자원봉사유공(2000)충북도지사도정시책발전공로패(2001)
◇현 세태 보면 훌훌 털고 절로 가고 싶은 마음 절실

그는 산외면 대원리의 한 가난한 농군의 자식으로 태어나 유년시절 운명처럼 겪었던 가난이란 두 글자를 떨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군 제대 후 자유당 시절 5급 공무원이 된 사람. 또한 불모지에 처음으로 사과묘목을 들여와 이제는 보은이 명실 공히 사과의 명소로서 ‘보은황토사과’의 이미지를 굳히게 되는데 일조했던 한 사람이다.
“요즘 세태를 보면 모든 것 훌훌 털고 절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조상대대로 불교집안이다 보니 자연 모든 것이 불교에 입각해 생각이 드네요. 요즘에도 번민이 있거나 세상이 복잡하고 싫어질 때는 조용히 1박 2일 정도 탈골암에 가서 휴식을 취하곤 합니다. 그것처럼 이 세상에서 행복한 순간이 있을 까요. 이 나이에 다시 불교대학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 벌써 1년이 지났어요. 포교사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어요.”

◇보은토박이 6형제 중 넷째로 아래로 동생 둘 생존

그는 보은삼산초등(36회), 보은중(1회), 보은농고(6회)를 졸업한 순수 보은토박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렵사리 공부해낸 동생들을 바라볼 때 마다 지역사회에서 늘 마음 든든하다는게 그의 일성이다.
“6형제 중 위로 3명은 돌아가셨고 언제나 함께 걸어가는 인생 속에서 당당히 자부심이 되어 준 동생들이 있어 마음 뿌듯합니다. 고려대를 나와 전 경제기획원, 쌍용자동차 회사를 거쳐 현재는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춘희가 74세이고 전 보은위성중계소 내무국장을 거쳐 서울 김포, 신촌 국장을 지낸 정희가 고희를 맞고 있네요.”

◇30년 전 ‘봉사’의미 알게 한 고학생·소년소녀가장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면장을 하면서 여기저기 들려오는 어려운 일은 외면하지 않았어요. 굳이 말하자면 모교인 자영고의 창고 수리라든가 명절 때 노인양반들에게 양말켤레 사드리는 일 등등 그런 것들로 봉사를 알게 된 거지요. 지금 희미하게 기억하지만 구인리, 장안리의 노인들에게 1주일에 한 번씩은 막걸리 한 통씩 사다 드리곤 했지요. 잘은 모르지만 그것이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보람이 자꾸 생겨나게 했던 것 같아요. 남들에게 내로라하는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도와주었지요. 제일 생각나는 건 모교의 한 후배였던 소년소녀가장이었던 신암리의 우석이 였지요. 돈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그를 졸업시키고 울산 조선소였던 가로 취직을 해 갔지요. 취직 후 2년간은 소식을 통해 알고 지냈죠.”

◇말단공무원부터 시작 ‘1등 면장’ 소리 들으며 퇴직

“1958년 보은군청 입사한 이래 재무과에만 오래 전전했지요. 세정계만 오래 있다 보니 지역의 사업가분들과 막역한 관계가 되어 다방면에 걸쳐 많이 배웠지요. 제중약방을 했던 박인희씨를 비롯 박충근, 박기종씨 등등. 세정계장을 거쳐 삼승부면장(74~77년), 감사계장, 탄부면장을 거쳐 퇴직했어요. 재직시절 저는 과수원을 하며 군청에서 묘목지원사업(자부담포함)으로 삼승면 원남리에 사과를 입식했어요. 그때부터 사과원산지의 시작이 된 거지요. 이후로 노티리, 고승리, 용암리, 세중리 등등에 파급시켜 당시 마로면 구이서(농촌지도소장)씨와 매월 순회교육도 실시했지요. 그 덕에 과수협회장직도 15년 정도 맡아서 했어요. 그때 일본 선진지 견학으로 사과 농장에 은박지를 도포하여 방사광으로 착색을 돕는 멀칭작업을 통해 사과가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 착색되는 것에 성공을 했어요. 그래서 농가들의 소득증대에도 기여를 했던 것 같아요. 당시 48농가에 기술 지도를 하면서 청주농촌진흥원의 조진태 박사도 농장에서 3년간 실험실습을 했어요. 생각나는 게 또 있다면 원예조합보은지소를 설치했던 일이죠. 그를 통해 대만, 홍콩 등지로 수출 길을 트는 계기도 됐어요. 이로 인해 과수협회장, 조합장 등을 지내며 각종 공로패도 많이 주더군요.”

◇직원대상 한문교육 매주 한 시간씩 ‘노익장’ 과시

지난 2004년 인수한 보은자동차공업사 고문역할을 하며 직원들을 대상으로 매주 월요일 한 시간씩 한문 교육을 통해 논어, 맹자 등 고사성어를 가르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왕성하게 지금도 가정 일을 돌본다는 부인 유문식(77)씨와 2남 4녀를 두고 있다. 또한 “직계비속으로 손자손녀를 합쳐 무려 28명이나 된다.”며 너털웃음 짓는 그는 여전히 활동가다.
예전부터 틈틈이 읍면 사회복지사를 통해 귀동냥으로 얻는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여전히 발 벗고 나설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그다.
“우연히 대학교수인 큰사위(유승현), 둘째사위(유재기)가 모두 유씨”라고 말하는 그는 잘 성장해준 자녀들과 여전히 지역동문으로 서로를 위해주며 현재 그의 회고록을 작성하고 있다는 송기수씨(76·교직 42년 근무)는 인생의 위안자다.
“칭찬은 없는 데서, 쓴 소리는 꼭 친구 앞에서 한다.”는 절친 동문인 송 씨는 지역사회에 남몰래 많이 훈훈하게 자선을 해온 친구라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천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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