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 장사 40년 김 영 오 씨(내속리면 사내리)
딸랑딸랑.속리산 거리에 등장한 이소리는 무슨 소리일까. 틀림없이 두부장수일 것이다.
아주머니 두부 한 모 주세요. 갓 시집을 온 새댁은 두부 장수가 아닌 콩나물 장수인 것을 보고 조금 놀란다.속리산에 등장한 콩나물 장수를 보고 연출을 해본 것이다. 오후 2시만 되면 어김없이 속리산 거리에는 종소리가 들린다.
콩나물 장수 김영오(62)씨가 리어커를 끌고 나와 장사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다.수정초등학교 인근에 집이 있는 김영오씨는 집 근처에 있는 식당을 거친 후 다리를 건너 레이크 힐스 호텔에서부터 대형 주차장이 있는 여관가, 식당가까지 골목골목을 누벼 하루에 걷는 거리만 해도 족히 6km 가까이 될 정도다.
장사가 잘되든 잘 되지 않든 김영오씨는 정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어김없이 리어커에 콩나물을 싣고나와 일일이 그의 40년지기 고객을 만나러 다닌다. 그래서 속리산 상가 주민들이 그가 나타나면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속리산 콩나물 아주머니는 오신다”라고 유행가를 개사해서 부를 정도라는 것.
홀홀단신으로 15세였던 김영오씨가 28살로 역시 홀홀단신이었던 이재남씨(1992년 작고)를 만나 결혼, 화전을 일구며 근근덕신 살아가던 때 콩나물 장사를 시작했으니 콩나물 장사 역사가 40년은 족히 넘었다. 처음에는 이것도 어려워 썩어서 버리는 것이 더 많았다.
하루에도 수 십차례 물을 줘야만 잔 뿌리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남편은 물당번, 김영오씨는 판매를 맡는 것으로 분담했다. 처음에는 리어커도 없어서 머리에 이고 식당을 돌았다. 팔, 다리, 목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지만 김영오씨의 콩나물을 기다리는 손님들 때문에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속리산에는 모두 그의 콩나물을 이용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열심히 일한 탓에 자전거를 살 수 있었고 그 다음은 지금까지 계속 끌고 다니는 리어커를 샀고 아울러 종소리를 내며 콩나물을 팔았다. 또 일일이 손으로 물을 주던 것을 기계가 알아서 때 맞춰 물을 주는 기계를 설치하는 등 크게 발전했다.
그렇게 콩나물을 만들어서 파는 재미에 고생도 모르고 있던 때 남편은 느닷없이 병에 걸려 9년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콩나물 판 돈으로 큰 딸은 4년제 대학교, 작은딸은 간호대학을 마쳤고 결혼도 했으며 27살인 막내 아들은 대학원까지 진학시켰다. 자녀들 교육시키는 재미로 아플 새도 없이 40여년 동안 병원 신세 한 번 지지 않고 버텼다.
그래도 40여년을 한결같이 아침 5시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콩나물을 다듬어 500원짜리, 1000원짜리로 나눠 담고 또 콩나물 콩을 앉혀놓고 오후 2시경 집을 나선다. 그때부터 상가를 돌면 빠르면 6시, 늦으면 7시까지 돌기도 한다.
4, 5월과 가을철 수학여행단이 많이 오고 관광객이 많을 때에는 콩나물 5말 정도 분량을 하루에 팔았을 정도였지만 겨울철 등에는 하루에 한 말 분량의 콩나물도 다 팔지 못하는 날도 있다. 이제 자녀들은 엄마가 고생한다며 그만하라고 만류하지만 그래도 김영오씨는 70세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콩나물을 실은 리어커에서 손을 놓지 않는다.
<여기 이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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