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속리 여름 아침
상태바
장속리 여름 아침
  • 김종례
  • 승인 2011.06.23 07: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펴 볼 사이도 없이 꽃비를 뿌리던 사월이 가고, 연한 잎이 싱그럽게 돋아나 연두빛 잎새들이 눈부시게 빛나던 오월도 훌쩍 지나가고 어느덧 성하의 초여름이 돌아왔다. 요즘 들어 잠에서 깨어나면 맨 먼저 들리는 것은 논둑밭둑을 오가는 부지런한 농부들의 발자국 소리다. 얼마전만 해도 논물 써레질소리에 잠이 깨곤 했는데, 요즘은 모내기를 끝낸 들판으로 나가는 경운기소리에 새벽잠은 여지없이 달아나버린다. 그러면 새벽공기를 온몸에 받으며 이 세상 어느 싱그러움에도 비교할 수 없는 여름 들판을 음미하곤 한다. 오직 떠오르는 태양에 전라가 반사되어 탱탱하니 물오르며 눈부시게 반짝이는 감나무 잎들만이 확 트인 시야를 살짝 가리울 뿐, 막힘없는 바람들의 소통으로 여름아침은 이렇게 두런두런 싱그럽게 열리곤 한다. 그러면 나무 평상에 앉아 여러가지 채소들과 아침 인사를 나눈 뒤, 이리저리 틈새를 거닐며 어제보다 한 뼘은 더 자라나 고개를 기웃갸웃거리는 그네들의 속삭임을 들어주는 일이다.
작은 호박씨가 예쁜 싹을 틔운지 열흘쯤 되었는데 어느새 뭉글뭉글 뭉게구름마냥 넓은 잎들이 나무위로 활개를 친다. 그 옆에 간신히 비집고 앉은 상치들은 연한 연둣빛을 내며 저녁상에 오를만큼 쑥쑥 자라주는 게 여간 기특한 게 아니다. 고추 또한 작은 가지에 수십개의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는 날마다 통통히 여무는 걸 보면 신통방통하기 그지없다. 오이와 수세미가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 새끼줄 따라서 지붕으로 기어오르는 앙징스러운 모습에서도 생에 대한 의욕이 모락모락 용솟음친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우울증으로 마음고생 하실 무렵 ‘이것들이 자라고 있는 걸 보노라면 마음의 감기가 상쾌히 치유된다’고 하셨던 오랫적 말씀이 이젠 내게도 실감이 난다. 어머니의 힘들었던 고비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가끔씩 삶의 뒤안길이 울적하거나 아파와도, 매일매일 이것들과의 소통으로 인하여 마음의 활력소를 풍족하게 얻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비타민이 퐁퐁퐁 공급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자식을 기르는 재미에 비교된다고나 할까? 정성과 사랑을 쏟으면 쏟은 만큼 기쁨과 보람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소망의 열매들을 여름내내 만끽하게 해 준다.
채소밭을 한 바퀴 돌고나면 사립문 어귀에 자리잡은 작은 꽃밭이 기다린다. 영산홍, 패튜니아, 작약, 나리꽃, 덩쿨장미, 찔레꽃 등 여름꽃들이 다투며 꽃을 피워 초가을까지 정녕 심심치가 않다. 3월이면 울타리 틈새마다 피어나는 산수유가 꽃샘추위가 올 것을 미리 알려주더니, 4월의 전령사 목련꽃이 잠시 이생의 몽환처럼 우아하게 피었다가 치근대던 봄비에 어머니 옥양목 버선마냥 뚝 뚝 떨어지더니, 5월이 되자 작년에 심은 영산홍들이 핏빛을 뿜어대며 행인의 눈길을 요염하게 끌어대더니, 요즘은 무너진 헛간 흙더미에서 패튜니아들이 덩쿨을 뻗어가며 피어나 오색빛 동산을 이루었다. 호국선열들의 넋을 위로라도 하듯이 옹기종기 우루루 피어난 수백송이 넝쿨장미들의 열정과 장미와 벗하려고 안간힘으로 꽃을 피운 하이얀 찔레의 순박하고 부드러운 손짓은 정녕 정겨웁기 그지없다. 오늘 아침엔 겨우내 얌전하게 엄동설한을 견뎌 온 착한 작약이 진분홍 꽃송이를 다섯 개나 막 터뜨렸다. 탄성을 지르며 쪼그리고 앉아 현숙한 자태를 바라보니 오랫적에 떠나신 어머님, 고모님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건 또 왜일까? 머지않아 각양각색의 꽃을 피울 준비에 분주한 분꽃, 백일홍, 봉선화들까지 여름아침 가족이 되면 내 작은 마당은 한바탕 잔치집이 되어 더욱 북적거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여름 내내 마당 식구들과 인연을 맺다가 어느 날 돌연히 이별의 왈츠를 추는 저네들만의 삶의 방식을 꽃밭을 가꾸어 본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꽃향기를 맡으며 일상의 먼지들을 훌훌 털어버리는 여유로운 삶을 알고 있다. 일상의 버거움 때문에 까맣게 잊고 살았던 원초적인 세상을 만나기 때문이다. 바람이 일렁일 적마다 그 특유의 미소로 소곤대는 저들만의 귓속말이 어찌 이리도 감미로운 것인지...저마다 개성이 넘쳐나는 눈빛으로 살포시 안겨오는 귀여운 모습들이 어찌 저리도 정겨운 것인지...
이렇게 아침을 열어가는 생명의 소리들은 우리에게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자연 비타민제다. 문화생활에 지친 마음과 몸의 돌파구를 자연에서 찾는 슬기로운 인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삶의 현장속으로 숨어 들어와선 대자연의 순리를 조용히 일러주다 계절이 바뀌면 훌쩍 떠나가는 한해살이 생명의 섭리는 우리네 짧은 인생 스토리와 너무도 유사하다. 진정 인생의 진솔하고 위대한 스승이 아니겠는가! 이 싱그러운 생육의 계절에 아름답고 은혜로운 선물에 귀 기울여 그네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을 공감 공유함이 좋지 않겠는가! 오늘도 내 작은 마당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허락해 주신 여호와께 감사드리며 여름아침 단상을 맺는다. (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