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생 봉사와 베품은 그의 화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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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생 봉사와 베품은 그의 화두였다’
  • 천성남 기자
  • 승인 2010.09.09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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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적십자회장, 여성단체협의회초대회장 대한적십자종신봉사원패, 목련장 등 수상
현복순 전 보은군여성단체협의회장
 ‘여자의 일생’이란 유행가 가사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슴 저린 사연이 너무나 많다. 일본합방과 해방이후 6·25민족 전쟁이 가져다 준 역사적 아픔 속에서 그의 인생도 무관하지는 않았다. 무척이도 어려웠던 시절, 적십자봉사회를 시작으로 오직 봉사와 베픔 만이 전부라는 생각으로 지역의 단체들을 끌어 모아 여성의 권익향상을 기초로 최초 여성단체협의회 초대회장을 지낸 여성계의 정신적 지주 현복순(84·보은읍 삼산4리) 여사를 만나봤다. 〈편집자 주〉

◇나이는 많지만 정신만은 아직도 ‘이팔청춘’

올 봄 치아에 문제가 생겨 치료를 받은 후 부쩍 입맛이 떨어졌다는 그는 마른 몸매에 대한 남다른 걱정을 특유의 유머로 풀어냈다.
“앞니에 문제가 있어 치과치료를 했더니 입맛이 뚝 떨어지더라구요. 나이는 정말 어쩔 수 없나 봐요.”
힘이 붙여 말도 못할 것 같은 그는 금 새 여성들의 역할과 권익향상에 대한 말이 나오자마자 눈에 힘이 들어가고 두 손이 연신 힘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후배들도 잘하고는 있지만 답답한 구석도 많아요. 단체를 이끌려면 언제나 봉사와 타인에게 많이 베푸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죠. 이익을 생각하며 단체를 이끌어가려하면 잘 되지 않은 것이 세상이치야.”

◇불모지인 보은에 최초 여성단체협의회 태동

그는 여성의 권익과 여성발전을 위한 변변한 단체가 없었던 지난 1989년, 최초로 여성단체협의회란 단체의 기틀을 마련하고 보은적십자 봉사회를 기반으로 한 여성권익을 표방하는 진보적인 여성단체를 태동시켰다.
당시 군과의 조화 속에 재경군민회와도 유기적인 인맥관계를 형성, 출향인들의 뛰어난 재원을 지역 발전에 응용할 수 있었던 계기도 마련했다. 그는 겉으로는 천상 여성이었지만 사고에 있어서는 여걸로 불릴 만큼 여성들의 리더역할을 담당했다.

◇선친에 물려받은 땅 팔아 보은공업사 창업

그는 선친에게 물려받은 적음리 소재 땅을 팔아 현재 신라식당 자리를 매입한다. 그리고 1968년 30대 여성으로서는 감히 생각조차 어려운 자동차정비업체인 ‘보은공업사’를 창업해 11년 간 운영을 해 온 여성이다.
당시 여성으로서 지프차를 몰고 다닐 만큼 그의 성정은 어쩔 수 없는 여장부의 기질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말로는 경영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남자들을 상대하며 하는 장사이고 보니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만만찮았어요. 어려웠을 당시 내북초등 동창이었던 교통부 소속의 송경빈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그것은 내 인생에서 큰 축복인 셈이었지.”

◇동지로, 친구로 뇌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

“당시 친구로서, 동지로서 기억에 남아있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당시 내 후임으로 적십자회장을 맡았던 박인자(김주태씨 부인), 보은적십자 초대회장으로 나를 봉사활동에 입문하게 했던 엄혜숙(최성렬 전 교육장 부인), 오갑환(윤장혁씨 모친)씨 등 이 바로 그 사람들이야.”
내북면 봉황리 출생인 그는 왜정시대 때 겨우 보통학교만을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다. 그러나 당시 여성으로서 보통학교라도 졸업한 것이 화가 되어 정신대로 뽑혀 갈 판국이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지. 오직 끌려가지 않기 위한 필사의 노력으로 중신애비에 밀려 청주 모 인사에게 시집을 갔어. 농사를 천직으로 아는 부친은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았어. 그러나 얼마안가 결혼생활은 끝이 나고 그 후 난 다시 혼자가 되었지요.”
슬하 자식이 없는 그는 현 신라식당을 경영하는 이질조카 사위인 금영민·박영자 사장 내외의 보살핌 속에 살고 있다.
그래도 “꼭하나 후회가 있다면 내 평생 아들하나 못 만들어 놓은 것이 후회라면 후회지”라며 주위의 객쩍은 소리를 척 받아치는 그는 여걸임에 분명하다.

◇농사꾼 가정에서 돈쓰는 품새는 천 상 갑부

“언제나 1년 농사를 지어 벌어들인 돈은 모두 내차지였지. 부친께서는 나에게 어려움 없이 돈을 주시곤 했어. 한해농사 지은 돈을 모두 가져가도 뭐라 하신 적이 없어요. ‘저 먹고 살 것은 다 태이는 법’이라고 하시면서요. 그 돈으로 친구들에게 밥 사주고 사먹고 뭐 그리 살 것이 많았는지 내 돈쓰는 품새는 갑부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지.”
그것이 기본이 되어서인지 단체를 운영할 당시에도 그는 베푸는 것이 천직이었다. 신라식당을 경영하며 얻은 수익금을 봉사활동비에 보태는 것이 그것이었다.
보은적십자봉사회를 이끌 당시 보은, 옥천, 영동 등 3군을 통합한 단체를 운영하면서 봉사회원 수가 급속히 늘어나자 보은, 옥천, 영동 지구로 분리가 됐다. 분리가 되면서 그는 지난 1989년 보은지구회장을 맡아 4년간 부녀봉사회를 이끌었다

◇7년 전 여성단체협의회 전성기 시절 구가

“적십자봉사회장을 맡으며 89년에 여성단체협의회 초대회장을 맡았지요. 당시 여성단체협의회원은 1000여명에 육박할 정도로 아주 전성기였어요. 직장인, 농업인, 사업인 할 것 없이 마음들이 모아져 단체대회는 물론 회의나 행사 때도 벌떼처럼 몰려들 왔어요. 당시 남자들도 지역협의회나 JC 등도 있었지만 우리 단체와는 비교가 안됐어요. 적십자봉사회, 부인회, 육영회 등 11개 단체가 합해졌으니 기세가 등등했지.”
타 단체들에게 비추인 것도 당시는 ‘여성단체가 크게 뭉친다’는 인식을 준 탓에 재경군민회와의 원활한 인맥이 형성됐다.
“지금 생각해도 재경군민회 이재수 전 회장은 여성단체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어요. 당시 김종철 군수시절, 사석에서 재경군민회와 여성단체협의회가 연결될 정도로 좋았으니 질투할 정도였지요. 어떤 행사다 하면 군청버스 2대로 단체장등을 태우고 서울까지 참여하였으니까. 조카인 임병옥 재경군민회장은 말할 것도 없고요.”

◇당시 군 사회복지과와 견제하며 활발한 활동

“사람의 일은 사람에 따라 형편이 다르게 때문에 위선이 많아. 당시 회원수가 1000여명에 육박하니 별일도 많았지요. 새벽 2,3시도 좋아요. 밤잠도 못잘 정도로 전화가 와서 잠을 설칠 때도 있었어요. 각 단체와 군과의 이간질을 시키려는 음모의 전화였지. 내가 뭐 해결사인가요? 마치 복잡한 문제도 다 해결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런 일이 벌어졌던 거지요. 개인의 능력은 분명히 있어요. 나의 후임회장을 맡았던 우리 이유남 회장 같은 사람은 나의 맏아들 이라 생각하고 있을 정도지요. 그래도 지금 와서 잘 한 것은 후배들에게 조그마한 금액이지만 3500만 원의 종잣돈을 여성단체협의회에 대물림해 주었다는 것이죠. 단체를 이끌기 위해서는 무조건 필요한 것이 운영자금이니까요. 그 어려움을 알기에 그렇게 했지요.”
한 평생을 봉사와 나눔의 정서로 일관해온 그의 성정은 부친의 1년 농사를 고스란히 받았던 사랑의 힘과 무관해 보이지 않은 것은 왜일까.
/천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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