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은 보은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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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은 보은의 얼굴이다
  • 보은신문
  • 승인 2000.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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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 유산 그 가치는 어디로…
삼년산성의 역사성
보은군의 신라시대 옛 지명은 삼년산군, 역사적으로 고대부터 현재까지 보은군이 위치한 지리적 배경으로 인해 생성된 많은 유·무형의 문화재를 남겼고 그 대표적인 문화재가 1973년 5월 25일 사적 제 235호로 지정된 삼년산성일 것이다. 삼년산성은 보은읍 어암리 오정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축산성으로 둘레 1,680m, 오정산의 능선을 따라 문지 4개소와 옹성 7개소, 우물터 5개소, 수구지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이 성은 470년(자비왕 13)에 축조되었으며 486년(소지왕 8)에 개축되었고 당시 삼년군, 삼년산군으로 불리면서 삼년산성으로 불린듯하나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후 삼년산성은 오항산성, 오정산성으로도 불려왔다. 삼년산성이 사적으로 지정되게 된 결정적인 중요성은 삼년산성의 축성방법과 신라가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지리적인 요충지중 한곳으로 문화적 학술적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삼년산성은 포곡형으로 구들장처럼 잡작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정자모양으로 한 켜는 가로쌓기, 한 켜는 세로쌓기로 축조하였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아 13∼20m에 달하며 거의 수직으로 쌓여 있다. 이처럼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축조하였기 때문에 그 하중도 막대하며, 성벽 모퉁이의 하중이 큰 부분에는 기초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4중의 계단식으로 쌓았다.

삼년산성의 문지는 동서남북 네곳에 있으나 지형상 동문과 서문을 많이 이용한 듯하며 그 넓이는 대개 4.5m에 달하고 수구는 지형상 가장 낮은 서쪽 방향으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동쪽에는 지상에서 약 1m되는 성벽부분에 65×46㎝의 5각형 수문이 남아 있다. 또 7개의 옹성은 대개 둘레가 25m 높이 8.3m로서 지형적 적의 접근이 쉬운 능선과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되었으며 우물터는 아미지라는 연못을 비롯하여 5개소의 우물터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복원을 시작하면서
삼년산성이 사적으로 지정도니 이후 단순히 역사적인 중요성만을 인식하고 있던 사항에서 삼년산성의 직접적인 복원 사업은 지난 1980년 7월 22일 보은지역의 집중호우로 인해 서문지 부분이 무녀져 내리고 유구가 드러나 발굴한 결과 성문에 사용했던 신방석과 주초석을 찾을 수 있었다. 또 성문은 신라의 상대와 하대에 축조되었으며 상대문지의 문지방석에 수레바퀴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분석한 결과 중심거리가 1.66m에 달하는 큰 수레가 다녔던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삼년산성의 역사성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80년 수해이전 1979년 12월에 발행된 [보은 삼년산성 기초조사 보고서]를 통해 산성의 보존방안 탐색을 제시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보은군과 충북도에서는 삼년산성의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관리와 보호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여러차례의 정비 복원사업을 진행하였고 1983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의 도움으로 삼년산성 보존의 일환으로 성내에 집수되는 다량의 물을 성밖으로 효과적으로 배수키 위한 기본자료의 수집과 성내에 현존하였을 옛 연못을 확인하고 이를 복원 정비키 위한 자료수집에 들어갔다. 당시 전대미문의 큰 수해가 발생하면서 응급발굴로 시작된 조사보고는 서문지에 잔여한 신방석등의 유구가 드러나고 성내외를 잇는 통행로가 유실되었기 때문에 일정한 보축을 요하게 되었다.

1983년 조사결과 [삼년산성 서문지 조사개보]가 발표되면서 삼년산성은 그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으나 이에대한 종합적인 보존방법을 시행하는데는 예산문제, 기법문제 등의 난점을 남겼다. 당시 향후의 정비계획으로 성내의 유수를 배수시키는 방안은 현재의 서문유구와 그 보강을 위한 보축 아래 암거가 설치되어야 하고 연못지는 준설을 하여 정비하되 나타난 수구지의 유구는 원상을 보존하도록 조처하며 향후의 완전한 보호와 정비를 위하여 추후 전반적이고 정밀한 조사를 통해 연차적인 보수·정비 계획을 수립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1983년 조사 발굴이후 간헐적인 각계각층이 답사를 진행했으나 종합적인 보존대책을 강구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예산과 정확한 지표조사만의 과제를 남기고 서문지와 허물어진 축성의 보축만을 진행하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삼년산성은 사적 지정된 후 20년이 지난 지금, 종합적이고 정밀한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20년이 지난 삼년산성의 모습은 어떠한 형상을 하고 있을까 지역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주민이라면 어떤일이 잘못되가고 있는지 가름할 수 있다. 지금 삼년산성의 모습은 종합적이고 정밀한 진단없이 80년 7월 보은수해로 인한 피해복구 차원의 석축보강사업만을 진행하는가 하면 이것도 옛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석축공사를 하고 있는듯한 인상이다.

27년이 지난 지금은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보은이 80년 수해와 98년 수해를 거치면서 삼년산성은 현대인이 쌓을 수 있는 석축공법의 표상"이라고 한다. 어느 누가 현존의 삼년산성을 보고 1천 5백여전의 유물이라고 말할 수 있겟는가? 누구와 무엇을 위한 복원인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수 없다. 이러한 작업이 고대 우리민족의 슬기와 후대에 조상의 얼을 심어 줄 수 있는 역사적인 첫삽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삼년산성과 숨결을 같이 했던 이 지역민 모두의 책임일 것이다. 1983년 조사이후 삼년산성뿐만아니라 산성 주변의 고분군에 대해서도 종합적인 조사가 더욱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의 넋과 얼이 숨쉬는 역사의 현장이 도굴꾼들과 무지한 지역민들의 거침없는 손길로 파헤쳐지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는지…

6·70년대 시대적 배경속에서 존재하기 어려웠던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였지만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가치가 인정돼 조상의 숨결을 되찾아가고 있지만 27년이 되도록 원형보존은 두번째라도 지역의 역사성마져 흐리게 하고 있다면 전면적인 대수술이 필요하지 않을까. 열악한 재정자립도와 침체되는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보은군의 경제적인 실정에 문화재를 보존하고 복원하는 작업이 자칫 배부른 소리나 예산타령으로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이제 문화는 그 지역의 생명과도 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재 복원 한계인가 포기인가
27년 동안 수십억여원의 예산을 투입해 조성하고 있는 산성의 모습이 학계를 비롯 일반인까지 잘못된 복원이라고 지적되고 있다면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삼년산성을 사적지로 지정한 해당 문화재청을 비롯 충북도, 보은군의 실무책임자들은 지금의 복원방향보다는 향후 삼년산성이 어떻게 활용돼야 하며 어떠한 모습으로 복원해야 할지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세계인들에게 비록 허물어진 문화유산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조상들의 슬기를 보여줄 수 있는 유형의 문화가 보존된 보은을 소개할때 지금의 깔끔하고 정련된 문화유산이 아닌 있는 그대로, 더 이상의 훼손을 막을 수 있는 보존이 필요할 때이다.

그래도 삼년산성은 보은의 얼굴이다
삼년산성의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데 있어 가장 중효한 점은 고증을 통한 복원, 1천 5백여년전의 역사성을 잃지 않고 현대인의 삶의 현장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우선 눈에 보이는 복원도 중요하지만 삼년산성의 석축복원보다는 산성 주변의 역사성을 찾아 접근할 수 있는 문화재, 사적지로 조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삼년산성의 복원에 뒤따르는 막대한 예산, 학술 전문가를 통한 정확한 지표조사등 어느것도 부정할 수 없지만 지금 우리 지역민의 마음속에 간직한 옛 조상의 숨결과 슬기를 엿볼 수 있는 문화에 대한 인식이 결여돼 포기한 것은 아닌지. 지금에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잘못되가고 있는 현실을 지켜만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삼년산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무책임은 과연 후대에 어떠한 평가를 내릴지 되집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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