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정 행복만들기(2) 정경상·레티미한 가족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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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가정 행복만들기(2) 정경상·레티미한 가족 탐방
  • 보은신문
  • 승인 2009.05.1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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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낳고 친정나들이 가기로 했는데 또 딸 낳았어요”
보은군이 바야흐로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이른바 글로벌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류가 이념과 인종의 종족의 벽을 넘어 서로 소통하는 그런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역류할 수 없는 흐름인 것이다. OCED(경제협력개발기구)는 한국정부에 ‘단일민족’이란 어휘를 더이상 사용하지 말도록 권고해 왔다. 다문화가정,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은 그동안 순수혈통, 가부장 단일 문화주의를 고수해 온 한국사회가 문화적 다양성에서 기인되는 ‘차이’를 어떤 시각에서 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관해 고민하게 한다. 이에 본지는 독자와 함께하는 ‘다문화가족 행복만들기’를 위해 다문화가족 관련기사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인생이란 강물 위를 끝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젊은 시절 통기타 가수로 이름을 날렸던 김광석의 ‘일어나’ 가사 중 일부다.
인생이란 그랬다. 돌이켜보면 물처럼, 바람처럼 순식간에 흘러가거나 사라져 가는 것이다. 삶이 머무는 곳에서 낯선 인연을 만나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고, 행복과 이상을 꿈꾸다가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이 인생이다.
이처럼 ‘한 낮의 이슬’같은 인생여정에서 우리는 아주 특별한 인연들을 만난다. 그래서 그런 만남은 너무나 소중하다.
오는 19일은 그러한 인연이 만나 3년째를 맞는 날. 비행기로 5시간 거리. 베트남 호치민시 근교 룡안에서 수줍은 처녀 레티미 한(24)이 잔뜩 두려움을 안은 채 낯선 한국 땅의 인연인 정경상씨(48)를 따라 인천국제공항에 발을 디딘 날이다. 그리고 일찌감치 천재 시인이 아름다운 안개 빛 피어오르는 경치에 반해 문학과 인연을 맺은 회인면 용촌리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이 곳 출신인 오장환 시인은 1947년, 시집 ‘나 사는 곳’ 서문에서 마치 다문화 사회를 예견하듯 ‘부첨하여 나 사는 곳을 알린다.
이제는 나 사는 곳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는 곳이다’ 고 노래했다. 서로 간 언어소통이 안되고 서로의 문화인식이 없었던 신혼초기의 한은 자주 눈물을 흘리며 살았다.
“방에서도 울고 밖에서도 울고 많이 울었어요. 고부간 갈등의 골이 깊었어요. 중간에서 제가 힘들었습니다. 달래주고 싶어도 말도 통하지 않고...”
남편 정씨가 당시를 회상하며 읊조리듯 말을 잇는다.

신혼초기 고부갈등 심해 많이 울기도

시대는 변했어도 변함없는 것이 바로 고부간 갈등이 아닌가. 말과 뜻이 통하는 한국인 며느리조차도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하물며 살아 온 환경과 풍습이 다르고 먹는 음식문화조차 전혀 다른 외국에서 시집 온 며느리이니 오죽 갈등이 많았겠는가.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살림살이 요령을 하루라도 빨리 익히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은 통하지 않고 답답하고, 언성이 높아가고... 제3자라도 당시 상황이 불 보듯 뻔하다. 한국인의 ‘빨리빨리’는 세계가 인정한 우리들의 전매특허, 그러나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아닌가.
“처음엔 나도 의사소통이 안돼 답답했지. 그런데 며느리가 착하고 눈치도 빠르고 부지런하다 느꼈는데 마치 딸 아이처럼 행동하는 거야.” 시아버지 정희성옹(77)은 며느리 칭찬에 침이 마른다.
작년 9월 부인과 사별하여 외로움을 많이 타고 있는 시아버지를 의식해서인지 며느리 한은 딸 노릇을 자처했다.
“면사무소 인근에 시아버지 친구 분들이 많아 거의 매일 그곳에 가는데 한이 오토바이로 모셔가고, 모셔오고 하죠” 보은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 이진양 방문교육지도사의 말이다.
“시아버지도 시장에 가거나하면 돌아올 때 며느리에게 주려고 무엇이든지 한 봉지씩 들고 온다고 합니다” 한국어를 가르치고, 속내를 털어놓고 고민 등을 상담했던 탓인지 이 지도사에겐 생활 속에서의 웬만한 사연들도 모두 공론으로 남는 모양이다.
한은 첫 애로 ‘살림밑천’이라는 딸 지윤을 낳았다. 그리고 남편과 ‘다음에 아들을 낳으면 친정인 베트남에 가기’로 굳게 약속했다.
그런데 얼마 전 또 둘째 딸 유빈을 낳았다. 한은 친정에 못 가게 된 것보다 아들을 얻지 못한 것이 정말 죄스럽고 미안했다. 유교권인 베트남도 장자승계의 전통이 있어 아들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자를 기대했을 법한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 한의 산후조리에 발 벗고 나섰다.

애들 빨리 키우고 남편과 함께 일하고 싶어

정옹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10여년을 생활한 해외경험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외국인며느리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치 않는다. 딸과 진배없는 며느리가 늘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이다.
“애들이 빨리 자라 유아원에 갈 나이가 되면 남편과 같이 일을 해야 해요” 농삿일은 최소 두 사람이 해야 하는데 정옹이 연세가 높아 이젠 힘이 많이 부친단다.
남편 정씨는 현재 8천5백 평의 논밭 그리고 과수원 등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베트남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온 가족이 힘을 합해 일을 같이 하는 것이 전통관례다.
“베트남에 부모님도 생존해 계시고 위로 오빠 둘이 있어요. 농사를 조금 짓고 있어요” 한은 친정 부모들과 집에 설치된 컴퓨터로 화상채팅을 한다.
다만 친정에는 인터넷 이용시설이 없어 호치민 시내 인터넷방까지 나와 서로 통화를 한다.
화상채팅을 통해 외손녀들을 보신 친정엄마가 보고 싶다며 빨리 베트남에 한번 들어오라고 성화다.
“조만간에 아버지 모시고 온 가족이 함께 처갓댁을 방문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정옹의 다문화가족이 만들어가는 소시민의 행복은 각 구성원들의 마음속에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었다.
글/사진 최동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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