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대사는 훈민정음 창제 주역(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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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대사는 훈민정음 창제 주역(끝) 
  • 송진선 기자
  • 승인 2008.12.19 1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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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복천암의 대승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가운데 속리산을 훈민정음으로 고을로 만들자는 주민들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본보는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주장에 의미를 부여하고 훈민정음 마을이 만들어지길 고대하면서 지난 8일 속리산 수정초등학교에서 한국 세종한림원장 강상원박사가 발표한 저서 ‘세종대왕창제주역훈민정음 주역 혜각존자 신미대사’ 중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었다는 부분을 발췌해 게재한다. 다만 서책대로 훈민정음 표기법을 그대로 준용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결론적으로 세종대왕 당시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을 기조로 삼았던 시대 상황하에서 신미대사의 훈민정음 창제주역에 관해 고찰할 때 왕조실록과 역사기록만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전제함은 타당하지만 절대적인 전제조건은 될 수 없다.

왕조실록 전체를 살펴봐도 유신들이 신미대사를 모략하는 구절만이 어지러울 뿐이다.
용암화상(龍巖和尙)이 찬술한 실담장해의총론(悉曇章解義總論)에 있는 범자오십자모실담장(梵字五十字母悉曇章)을 주석한 내용은 훈민정음 자모인 칠음과 또한  '·ㅣㅡ' 삼재의 근원이 바로 삼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실담장 오십자문이 훈민정음 창제의 근거인 사성과 칠음원리의 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확인된다.

훈민정음의 표기법과 언해자료, 자음병서의 이치를 실담어와 비교, 분석하므로써 신미대사가 실담어에 통달하였으며 유교와 불교에 통달한 학문을 겸비한 최고의 학승임이 밝혀졌다.

앞으로 마땅히 신미대사에 관한 역사적인 자료가 많이 새로 발굴돼 조명이 상세히 더욱더 이뤄져야 할 것이다. 본 신미대사에 관한 탐구는 마치 아침 동트는 찬란한 한 줄기 햇살을 잡은 느낌이라, 더욱 밝은 빛이 비치기를 기원할 뿐이다.

어쨌든 계해 정통 11년 9월 상한 세종대왕께서 집현전 학자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훈민정음 28자를 공표하심으로 탄생돼 나온 것이다.

정음창제는 정음지작무소조술(正音之作無所祖述), 즉 어떤 조사(祖師)도 창제할 수 없다는 결정적인 고백을 집현전 학자들이 하게된다.

그러므로 세종께서 신미대사를 왕사격으로 그토록 공경하고 역마를 타고 궁궐을 드나들게 특전을 베프시지 않았던가. 신미가 정음창제 주역으로서 당시엔 공인하려하지 않더니 560여년이 지난 오늘 돌아보면 실담어 음운법칙과 자음합용병서(字音合用竝書)와 실담어와 우리말의 어원이 일치하기 때문에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 신미대사임을 확증한다.

세종께서 훈민정음 28자를 공표(세종 28년, 1446년)하신 후 그동안 왕사의 예우를 받았으며 세종대왕께서 승하(1450년)하시고 문종이 즉위하매 잠시 장안에 머물다가 신미대사가 대자암과 정음청을 떠나 세종께서 재가(栽可)하신 역마를 버리고 다시 복천사로 되돌아온 후 더 이상 궁중에 들어가지 않았다.

웅문거필일세무적(雄文巨筆一世無敵). 만세풍진(萬世風塵)을 제압하신 신미대사는 열반(涅槃)할 때까지 복천선원에서 선정삼매(禪定三쭅)에 유류(遊流)하다가 77세에 입적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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