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대사는 훈민정음 창제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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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대사는 훈민정음 창제 주역 
  • 송진선 기자
  • 승인 2008.10.31 09:4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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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복천암의 대승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가운데 속리산을 훈민정음으로 고을로 만들자는 주민들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본보는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주장에 의미를 부여하고 훈민정음 마을이 만들어지길 고대하면서 지난 8일 속리산 수정초등학교에서 한국 세종한림원장 강상원박사가 발표한 저서 ‘세종대왕창제주역훈민정음 주역 혜각존자 신미대사’ 중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었다는 부분을 발췌해 게재한다. 다만 서책대로 훈민정음 표기법을 그대로 준용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유신들 눈에는 신미가 무슨 우국리세(祐國利世) 혜각존자(慧覺尊者)란 칭호가 해당되겠느냐? 우국리세(祐國利世)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백성들이 쉽게 글을 쓸 수 있게 하였으니 정치의 요결(要訣)이 되는 글자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에 백성과 나라에 이롭지 아니한가?

혜각존자란 부다(佛陀)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배워 원만무애(圓滿無碍 : 순조롭게 일이 되어가고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하게 깨달은 신성한 반열에 오른 제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신미에게 쌀 5백석, 정철 5만5천근, 면포 5백 필을 내려 준 일과 신미와 학열이 역마를 타고 궁궐을 드나들게 특전을 내려 준 것에 대한 유신들의 질시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사건에 대해 강한 비난이 그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신미대사가 왕사격(王師格)으로 세종대왕으로부터 공경을 받으며 역마를 타고 대궐문을 드나들 수 있었을까?

신미와 학열이 역마를 타고 궁궐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훈민정음 창제가 성공적으로 완성되어 갔으며 세종대왕으로부터 크게 신임과 총애를 받고 있음을 자명하게 시사하고 있다.

대신이라도 대궐입구에서부터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엎드려 걸어가야 했었던 것과 크게 비교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을 보면 '임금(문종)이 말하기를 세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왕사라고 칭하면 불가하지마는 그 밖의 직은 무방하였다'하고 하시었다. 이것은 왕사가 아니고 다른 직과 같으니 무엇이 불가할 것이 있느냐 만일 세종의 분부가 있었다면 비록 왕사라도 또한 공경하며 따라야 한다.

이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신미에게 승직을 제수하다. 신미를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리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碍) 혜각존자(慧覺尊者)를 삼고 금란지(金鸞紙)에 관교를 써서 자초폭으로 싸서 사람을 보내어 주었는데 우리 국조 이래 이러한 승직이 없었다.

우정언, 홍일동이 아뢰기를 신미의 칭호가 심히 의리에 어그러지고 박팽년이 언사로 죄를 얻었으니 또한 미편합니다. 무엇이 국가에 복리(福利)가 있기에 우국리세(祐國利世)의 칭호를 주어 일국의 보고 듣는 것을 놀라게 하십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확연히 강한 결단을 내리시어 급히 그 명령을 거두소서(문종 즉위년 2권 7월17일)
중 신미에게 정철 5만5천근 쌀 5백석, 면포, 정포 각 5백 필씩 내려주었다.(세조 34권 10년 12월22일)
문을 파수하는 절은 원각사, 내불당이고 역마를 타고 다니는 자는 신미와 학열이며…(중략)
신미가 승도(僧道)를 만들어 꾸며 임금께 총애를 얻었는데 수온이 좌우를 인연하여 수양과 안평 두 대군과 결탁해서 불서를 번역하고 만일 궁내에 불사(佛事)가 있으면.(세종 121)
위 실록의 이 구절은 영산김씨 세보(世譜)의 기록과 일치한다.

'세종조 집현전학사(世宗朝 以集賢殿學士)득총어세종자(得寵於世宗自)'세종께서 신미에 대하여 총애하심은 불교 때문이 아니라 왕사격으로 지극한 공경을 받았으니 정음창제와 관련된 공훈으로 인식된다.

정음창제가 세종대왕께는 바로 우국리세의 공훈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정음창제에 반대하는 상소가 들끓는 상황이었다. 세종은 정음청을 별개로 운영하면서 신미대사에게 왜 파격적인 특권을 내려주겠는가? 무엇 때문에 신미대사를 높은 자리에 모셔놓고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예경하고 존경하겠는가? 무엇 때문에 신미대사가 역마를 타고 다닐 수 있겠는가?

이와같은 은전은 신미대사가 세종대왕의 적극적인 성은에 힘입어 훈민정음 창제를 완성한 공훈으로 인식된다.

세종대왕이나 문종이 불교를 좋아하여 신미대사에게 특전을 내려준 것이 아니라고 언명한 바 있다.

즉 '너희들의 뜻이 반드시 불교를 좋아하여서 불경을 찍으려 하여 그러한 것이라고 하겠으나 그러나 나는 잠시도 불교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참조 왕조실록 원전 6집304면)고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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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녹준 2021-07-01 12:16:01
세계의 유명한 언어학자들이 말하기를 .세계언어의 뿌리는 산스크리트어(실담어=범어)에서 유래하고 파생 했다.라고말한다.
지금" 한국의토속 사투리가 바로 산스크리어다."
라고 밝혀 낸것이 강상원 박사다.
강상원 박사는
산스크리트어,영어,한학(한문),불교경전 ,한국어,100년간 조사집대성한 브리타니카 대백과사전을 독파하고 이해한 혜박한지식으로서 .
한국의토속사투리가 산스크리트어 라는것을 찾아서 밝혀낸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역사에 엳사의시작은 "한국인"이다.
이제 우리한국은 세계역사에서 인류역사의 중요한 부문으로 등장하고. 세계사를 리드하는 인류역사의 전환점에 강상원 박사님은 우리대한민국의 중요한 보배가되었다.
우리가 세계역사의 주역으로서 강상원 박사님을 모시는것은 커다란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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