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의 공신 김원량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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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의 공신 김원량 선생
  • 보은신문
  • 승인 2008.08.2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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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리지역 옛 이야기 <11>

김원량 선생은 경주김씨로 자를 명숙, 호를 미촌이라 한다.

1589년 선조 22년 호조판서 월천군 변의 아들로 보은읍 종곡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산사에 들어가 열심히 학문을 배웠고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가례, 소학, 심경, 군사록 등을 배우며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당시 인목대비가 폐위되어 유폐되고, 이귀, 김자점, 김유 등이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하여 반정을 도모할 때 학덕있는 선비를 참여시켜 유생들의 지지를 받기로 함에따라 선생이 이시백의 추천으로 참여하게 됐다.

이때 뒤에 영의정이 된 우재 이후원이 찾아와 “선비가 임금을 내쫓는 일에 참여하는 일이 의가 되는가?”라고 묻자 선생은 “송나라 때 태후의 명으로 조여우가 영종을 옹립할 때 주자께서도 같은 일을 하셨다”라고 설득하여 참여하도록 하는 등 선생의 활약은 매우 컸다.

하지만 거사가 진행되는 날 최명길이 선생에게 미리 연락을 하였지만 행동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능약군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모시러 갈 때도 선생은 움직이지 않았다.

1623년 광해군 15년 3월17일, 반정에 성공하여 논공행상을 하며 선생은 공이 없다고 상을 사양하였다.
하지만 인조는 “가상한 일이다. 그러나 네가 아니었다면 어찌 나의 오늘이 있었겠는가”하면서 정사공신 3등에 책록하고, 호조좌랑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선생은 적극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음에 벗들이 “임금의 명이면 사양치 못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 권하자 선생은 뜻을 고쳐 벼슬길에 오르게 됐다.

이어 선생은 학문이 높은 어진 이로 김집과 함께 뽑혀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24년 인조 2년, 어려서부터 함께 공부한 이괄이 모반을 꿰하려 한다는 고발이 있었다.
평소부터 흉금을 터 놓고 지내던 이괄이 자신의 흉계를 감추고자 당시 조정에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선생에게 “이번 고발은 무고다”라는 서신을 보냈고, 친구와의 우의를 존중하던 선생은 이괄을 위해 백방으로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선생도 같은 무리라 하여 옥에 갖혔다. 선생은 너무나 억울하고 또 자신이 밝지 못하여 벗을 깊이 알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옥에서 자신의 옷을 찢어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신이 배움이 적고 충성이 부족함은 잘 알고 있으나 임금을 속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고 하늘에 있는 해가 증명할 것입니다”라고 상소했지만 풀려나지는 못했다.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갈 때 선생은 김자점에 의해 처형됐다.
선생이 죽은지 38년만인 1661년, 선생의 권유로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공신이 된 뒤에 영의정까지 지낸 이후원의 아들 이선(예조참판)이 아버지의 유지롸 선생의 무죄하였음을 적극 주장하여 무죄가 밝혀지게 됐다. 선생의 묘는 현재 보은군 산외면 문암리에 있다.
이흥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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