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정리 서재원 옹은 꼿꼿하기로 유명하다.
꼿꼿하다는 것이 대쪽같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세가 반듯하고 건강하다는 의미다.
82세 고령에도 전국의 높은 산은 안가본 산이 없고 신정리에서 걸어서 구티리까지 온다는 주민 제보전화를 받고 서재원 옹을 찾아갔다.
그를 만난 곳은 건강지킴이인 산외면 전천후 게이트볼 장이다. 어르신을 무조건 모시고 신정리 집으로 향했다.
사실은 건강하다는 고령에도 높은 산을 등산한다는 주제를 갖고 취재를 계획했으나 그의 집에서는 그의 뛰어난 손재주를 자랑하는 제품들이 속속들이 나오는 등 취재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쏟아져 나왔다.
우선 등산얘기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본다.
# 농사에서 정년퇴직하며 등산
시골사람들 산악 모임은 정상을 밟아본다는 계획을 갖고 차에 오르기보다는 일단 지역을 탈피해 어디를 가는 것이 즐거워 차를 타를 사람들이 많다.
30명이 가고, 40명이 가도 정상을 오르는 사람은 불과 10명 남짓, 나머지는 산 아래에서 동동주에 도토리묵을 안주로 흥 겨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통의 어르신 산악 모임이다.
서재원 어르신이 회장으로 있는 덕성산악회도 마찬가지다. 고정적으로 30명이 산행 길에 동행하지만 정상을 오르는 사람은 이중 6, 7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82세인 서재원 어르신은 한 번도 정상을 밟지 않은 적이 없다. 그것도 뒤에 쳐지지 않고 꼭 앞서간다.
그가 이렇게 등산 재미에 빠진 것은 70세부터다. 죽어라 일만했던 그는 70세가 되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나름대로 마음먹고 산악회를 조직한 것이다.
그동안 전국 방방곡곡 산야에 발자국을 남긴 서재원 어르신은 산불조심 기간이나 폭설로 입산을 금지할 때가 아니면 혹한 장마 때도 매달 등산을 했다.
백담사에서 1박을 한 후 꼭두새벽에 산행을 하고 7시간을 걸어 내려왔던 설악산 대청봉 등산얘기를 하면서 얼굴에 화기가 돌았고 또 한번 가고 싶은 매력 있는 산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올랐던 덕유산에서 등산장비의 중요성을 체득한 서 옹은 “오르면서 땀을 흘려 추운 줄을 몰랐는데 1000m고지 오르면서 땀이 식고 추위가 엄습하는데 긴소매 옷을 갖추지 않았다면 죽을 뻔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고비를 겪었던 얘기를 쏟아냈다.
# 덕성산악회 만년회장
처음 등산을 했을 때는 나이가 조금 어린 사람들이 앞서가더니 이제는 회장님 쉬었다가 가요 할 정도로 늘 선두에 서는 그다.
꾸준히 발걸음을 옮겨 정상에 서서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서로 나이를 묻게 되는데 자신은 82세라고 하면 안 믿는다.
대청봉을 오를 때도 함께 등산을 한 300명 중 그의 나이가 가장 많았다. 산행을 같이 한 일행들이 80이 넘었는데 이런 험한 산에 오시느냐, 대단하다고 할 정도로 인사를 들었다.
2~300개의 계단을 오르고, 내리고. 되돌아보면 어떻게 대청봉까지 갔다 왔는지 정말 꿈만 같다고 말했다.
이렇게 등산으로 건강을 다진 그는 덕성산악회에서도 나이가 가장 많다. 회원 모두 72∼3세가 안된다.
그래서 지난해 회장직을 사임했는데 회원들이 회장님 때문에 정상에도 올라간다며 종신회장으로 재추대했다.
대청봉과 덕유산도 회원들이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을 회장이 이끌어서 갔을 정도니 회원들이 회장으로 재 추대할 만 하다.
서 옹은 앞으로 지리산 천왕봉, 한라산 백록담, 백두산을 오르는 것을 꿈으로 갖고 있다.
또 마음 같아서는 히말라야 등정도 희망하고 있다.
서 옹의 희망대로 이를 산을 올라 그를 다시 취재하기를 기대해 본다.
# 걸어서 구티리까지
등산도 걷기인데 이제부터는 진짜 걷는 얘기다. 신정리에서 구티리까지는 7㎞500m정도 되는데 이 거리를 걷는다. 시간으로는 꼭 1시간 20분이 걸린다.
덥고 다리도 아프고 차도 많이 다녀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는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집에서 구티리까지 걷게된 것은 대청봉을 등산하기 위한 준비운동 차원이었다.
등산 중간에 낙오하면 체면도 말이 아니고 일행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민폐를 끼쳐서는 안되다는 생각에 지난해부터 걷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보은읍까지도 5번 정도 걸었을 정도다.
지금까지 비가 오거나 날이 너무 뜨거운 날을 빼고는 늘 걸어서 구티리를 다녔다.
노인이 걷는 것을 안쓰러워 하는 운전자들이 지나가다 차에 타라고 권하기도 하지만 한 번도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심지는 매우 굳다.
그가 이렇게 걷기를 하는 동안 면내에서는 내기를 했을 정도다.
저 사람 언제까지 걷나 두고 보겠다. 저러다 말거야, 혹시 차를 타고 오다가 중간에 내려서 걸어오는 것 아니냐 등등 갖가지 얘깃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남들이 그런 얘기를 하거나 말거나 1주일에 한 번씩은 보은읍내 까지도 걸었다. 정말 전 구간을 걸어서 오는 것을 본 주민들은 결국 그의 소신에 박수를 보냈다.
# 손재주는 너무 섬세해
이런 강단을 가진 그의 손재주는 너무 섬세했다. 짚으로 삼태기를 만들고 짚신을 엮고, 사물함도 만들고 대추나무를 구해 윷을 만들고 일부러 종이끈을 구입해 물건을 넣을 수 있는 함을 만든다.
노인 솜씨자랑대회에 출품해 고가에 팔리기도 했다. 그의 이런 손재주는 이미 젊어서부터 타고났었다.
현재 살고 있는 집 안채도 직접 지었고 안방에 놓였던 장롱도 만들었다. 찬장을 짰고 제상, 두레판도 짰다.
문짝도 짰고 책상도 만들었다. 쇠로 만드는 것 빼고 나무와 짚으로 못 만드는 것이 없다.
그의 손재주는 널리 알려져 옛날에는 주문이 많이 들어와 약속시간을 맞추기 위해 밤새우기를 밥먹듯이 했다.
수려한 그의 손재주는 공장에서 기성 제품들이 나오고 보은에 농방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쉬게 됐다.
그래도 서 옹은 연장을 놀리지 않고 지금도 윷을 만들고 지팡이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눠주고 있다.
윷과 지팡이를 만드는데 공들인 것을 생각하면 그냥 주는 게 아깝기는 하지만 고마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잘 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가 막히게 잘 만든 윷과 지팡이는 마을 경로당에, 가족, 친지는 물론 동갑계원과 새마을 지도자, 6·25 참전 전우회 회원, 동네 주민에게 나눠줘 그들에게 다리가 되어주고 친목을 다지는 놀이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대학공부 한 사람 못지않는 실력
다방면에 뛰어나 학력이 높은 줄 알았던 서 옹의 정규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일본어를 배우고 한문을 배운 그는 시간 나는 대로 신문지에 붓글씨를 쓰고 옥편, 국어대사전 등을 항상 끼고 있으면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독학으로 넓고 깊은 지식을 갖춘 그는 산제 축문을 직접 작성할 정도로 글짓기 실력도 뛰어나고 비문제작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종사를 보면서 비문을 제작할 때 2, 30만원을 주고 남의 손을 빌리기도 했지만 성에 차지 않아 차라리 공부를 해서 내가 해보자는 생각으로 파고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보다 더 수준 높은 학식을 갖추게 됐다.
82세를 사는 동안 어느 한 분야에서도 빠지지 않는 그의 인생이 참 풍성해 보였다.
그런 그를 내조하는 부인 황선희(81)씨는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17살에 호랑이 같은 장남에게 시집을 와서 슬하의 4남2녀의 자녀를 잘 키워낸 것은 물론 시부모 봉양하고 시동생들 출가시키고 대쪽같은 남편 수발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서재원 옹은 내가 사는 동안 가장 고마워 하는 사람이 바로 안사람이라며 25년 간 종사를 보는 동안에도 없이 살면서 종친들이 오면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따뜻하게 밥상 차려 내놓았다.
종친회가 체계를 잡고 종사를 잘 마무리지은 것이 내 공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안사람의 공이라며 부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식들도 많이 가르치진 못했어도 속을 썩히지 않으면 효자라고 했는데 그동안 애미, 애비 속 한 번 썩힌 자식이 없으니 이것이 행복 아니냐”고 말하는 서 옹.
가정에 돈이 많아서 행복한 게 아니라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는 그의 가정이 참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