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야산이 온통 칡밭을 이뤄 치랏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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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야산이 온통 칡밭을 이뤄 치랏골
  • 곽주희
  • 승인 2008.07.0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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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면 갈전리
▲ 93년 9월 마을회관 옆에 세워진 갈전리 마을자랑비.

마른 장마로 인해 후텁지근한 날씨만 계속되는 요즘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라도 내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갈전리 마을을 찾은 6월의 마지막 날도 마찬가지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민들은 들녘에서 농사일로 바쁜 일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갈전리 찾아오는 길

보은읍에서 상주방면으로 25번 국도를 따라 차를 타고 15분 정도 가다보면 마로면소재지인 관기리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세중리쪽 505번 지방도를 따라 기대리에서 2004년 6월 완공한 기대∼세중간 농어촌도로를 타고 가면 바로 세중리가 나온다.

세중리에서 다시 18번 군도를 따라 가다 콘크리트 포장이 된 15번 군도를 따라 들어가면 나오는 곳이 바로 갈전리 치랏골이다.

또한 18번 도로변 시루산 아래있는 마을이 갈전리 증산이다.

#갈전리 마을의 유래

예전부터 칡뿌리가 온 동네 야산에 뿌리를 드러낸 채 흩뿌려져 있어 치랏골이라 불리는 갈전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증산리를 병합해 갈전리가 됐다.

옥천 전씨 집성촌인 갈전리는 마로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변둔리, 서는 세중리, 남은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 북은 소여리에 접하고 있다.

갈전리는 치랏골과 함께 자연마을로 시루산(증산)이 있는데 이 시루산은 갈전리 북쪽 시루봉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갈전리 치랏골은 현재 40가구 90여명이 생활하고 있으며, 시루산(증산)은 17가구 30여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농작물로는 벼농사가 주를 이루며, 고추, 콩, 과수(배, 사과, 감), 인삼, 대파, 한우, 젖소 등 복합영농을 하고 있다.

마을봉사자로는 전창호(52) 이장과 박금용(42) 새마을지도자, 차숙희(49) 부녀회장, 치랏골 임경안(71) 노인회장, 증산리 김종호(78) 노인회장이 잘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을회관 앞으로 93년 9월 세워진 갈전리 마을 자랑비가 우뚝 서 있다.

갈전리 마을자랑비에 새겨진 글귀 전문을 옮겨본다.

‘소백산맥 정기 타고 동쪽에는 매봉, 북쪽에는 시루봉이 감싸주는 아늑한 골짝에 한집 두집 지은 것이 한마을 이루어 그 이름하여 치랏골 갈전리라 하였도다. 인·의·예·지 삼강오륜 미풍양속을 이어 받으려 혹한의 쓰러진 아버지를 구하려다 십이세 어린 학생이 목숨을 잃은 효행비가 효자고개에 건립되어 가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답니다. 인심좋고 훈훈한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힘 모아 땀흘려 축조한 저수지는 우리들의 젖줄과도 같으며 후손들에 밥그릇과도 같도다. 그 뒤의 느티나무 정자는 바람과 함께 술렁술렁 춤이라도 추듯하는 이 아름다운 자연에서 풍요로운 인심모아 영원히 지키리라. 우리 마을 갈전리’

#치랏골의 젖줄 저수지

치랏골 서쪽입구 박금용 새마을지도자 목장으로 가는 길쪽 위에 움푹 파인 저수지가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해 내고 있다.

바로 치랏골 소류지이다.

일제시대에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축조한 저수지에서 물을 대어 논농사를 지어 치랏골 마을주민들이 배불리 먹고 살아가니 치랏골 소류지는 마을 주민들에게는 고마운 생명줄과 같다.

자신의 논둑에 있는 풀을 베고 계시는 고희창(80) 어르신은 “일제시대에 쌀 증산을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저수지” 라며 “저 저수지 때문에 농사짓기는 정말 편해졌지. 우리 치랏골의 생명과도 같아. 허허허”하고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마로면은 회인면과 같이 감나무가 많다. 갈전리도 집집마다 감나무 한그루씩은 있는 듯 보였다.

전창호 이장은 “대규모로 재배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나무가 쏠쏠한 소득원이 되고 있다” 며 “나무째로 장사꾼에게 팔거나 아니면 직접 따서 팔거나 깎아서 곶감으로 판다”고 말했다.

#마을의 자랑 효자고개

치랏골 저수지에서 옥천 청산으로 넘어가는 산허리에 쑥 고개가 있다.

지금은 효자고개로 더 많이 알려진 고개이기도 하다.

효행비가 있는 곳까지는 콘크리트 포장이 되어 있지만 그 이후부터는 비포장 흙 길로 되어 있어 차를 타고 가기에는 다소 무리인 듯 싶었다.

고개를 올라가니 74년 5월 정재수효행기념사업회에서 건립한 비석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효자 정재수의 효행비이다.

여기서 잠깐 효자 정재수의 효행에 대해 간단히 적어본다.

1974년 1월 22일 한밤중, 눈보라가 휘몰아쳐 살을 에이는 듯한 강추위가 연일 계속되던 밤이었다.

큰 집인 충북 옥천군으로 설을 쇠기 위하여 경북 상주에서 출발한 아버지와 아들은 치랏골마을로 거쳐 쑥 고개를 넘어 가고 있던 중이었다.

아버지는 습관처럼 주막에 들러 술을 마신 후 거나하게 취해있는 상태였다.

아버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술기운에 비틀거렸고, 어린 소년 정재수는 그런 아버지를 부축하며 눈보라 속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치랏골의 쑥 고개를 넘어가던 중 술에 취한 아버지가 졸음을 견디다 못해 자꾸만 쓰러져 잠들려고 했다.

추위 속에 쏟아지는 잠을 견디지 못하고 동사하려는 아버지를 살리고자 갖은 애를 쓰던 정재수 소년은 그만 힘이 부쳐 추위 속에 얼어죽고 말았다.

이튿날 새벽 이를 발견한 마을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 장례를 치러주고, 어린 소년 정재수의 효심을 마음속에 새기려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 주었다.

치랏골 주민이면 이 꽃다운 죽음을 지금도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인적 드문 효자고개의 조그만 무덤에 어린 생명이 잠들어 있다.

아버지를 살리려 발버둥치던 꽃다운 어린 생명. 효자고개 주위에 덩그러니 초라한 비석은 과연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정재수 효행비에 새겨진 글귀 전문을 옮겨본다.

‘서기 1974년 1월 22일 밤 정재수 이곳에 잠들었으며, 이는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소곡리에 태어났다. 십 세의 어린 나이로 혹한의 눈보라 속에 쓰러진 아버지를 구출하고자 못다 핀 생명을 바쳤으니. 아! 아버지의 영혼을 엎어주던 그 맑은 효행은 뭇 사람의 심금을 울려 길이 후세에 흐르라’

#갈전∼법화간 군도 확포장 조속 해결 바람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주어진 터전에 만족하며 땀흘려 농사짓고 살아가는 치랏골 주민들은 갈전∼법화간 15번 군도가 조속히 확포장되길 기대한다.

전 이장은 “예전에는 효자고개로 시내버스가 다녔다. 군에서 오는 2011년 5월까지 공사를 완공하기로 했는데 좀 더 빨리 완공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말했다.

지금 갈전리는 하루 5번의 시내버스가 다닌다.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고들 한다.

그리고 94년 파놓은 상수도 암반관정으로 식수는 물론 농업용으로 사용하고 있어 물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한다.

지난 2006년에는 범죄없는 마을로 선정돼 받은 상사업비 4천만원으로 마을 전기시설을 새롭게 바꾸어 주민들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부녀회와 상록회, 마을회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 마을잔치를 열어 마을어르신들을 위로하고 마을 주민간 화합과 결속을 다지는 등 행복한 마을을 가꾸어 가고 있다.

삼두봉(삼형제봉)과 시루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한 가족처럼 행복하게 살아가는 갈전리를 보면서 행복에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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