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는 1천원, 두 개는 2천원…
보은읍 삼산리 뚜레쥬르 빵 가게 맞은 편에 붕어빵을 굽는 부부가 있다. 지나다 보니 평소 알고 있었던 농아인협회 군지부장인 임원빈(52, 회남 신곡2리)씨다.
취재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그 자리를 가니 포장마차를 접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생각다 못해 무작정 장애인회관을 찾았다. 농아인협회 사무실 문을 여니 임원빈 지부장이 옥천 수화통역센터의 통역사와 화상대화를 나누고 있다.
반가웠고 취재를 하고 싶다는 글을 써서 보여줬고 곧바로 임지부장과 화상대화를 나눴던 수화통역사와 연결이 됐다.
취재는 이렇게 이뤄졌다. 먼저 기자가 팩스 전화를 이용해 임지부장에게 알고 싶은 내용을 통역사에게 말하면 통역사가 화상을 통해 수화로 임지부장과 대화를 나누고 기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취재를 하면서 언어가 되면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보은에 수화 통역사가 없기 때문에 겪는 불편이 보통 큰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체감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들은 농아인들끼리 모이게 되고 당장 시급한 문제가 아닌 경우에는 불편을 감수하면서 참는다고 했다.
하루 빨리 우리지역에도 수화통역센터가 생겨 이들이 겪는 불편이 조금이라도 덜어지길 간절히 바랬다.
(편집자 주)
붕어빵 굽는 농아부부 임원빈·도형숙씨대화가 잘 통해요
붕어빵을 굽는 임원빈·도형숙(49)부부의 일터는 리어카에 포장을 두른 곳이다. 두 명이 들어가면 꼭 맞았다. 머리맡에는 손님들이 잘 보이도록 와플 빵 1개 700냥, 3개 2천냥, 붕어빵 4개 1천냥을 적어놓았다.
취재하면서 내내 걱정스러웠다. 마음이 급하면 말이 빨라지기도 하고 되지도 않는 말로 어깃장을 놓기도 하는 게 우리네인데 도대체 일반인들과 어떻게 마음이 통할까.
그런데 말이 통한다고 한다. 눈빛으로도 알고 또 제품 가격을 게시해 놓았으니 특별히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래도 이들 부부는 눈빛으로 웃고 얼굴에도 옅은 미소로 손님을 맞는다. 일반인들이 장사하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웃는 얼굴이 어떻게 침을 뱉을 수 있겠는가.
사진을 찍겠다고 포즈 좀 취해달라고 주문을 하니 멋쩍게 선다. 사진을 찍겠다고 하면 표정이 굳어지기 일쑤이고 ‘김치∼’라는 입모양을 주문해도 억지 입 모양이어서 자연스럽지 않은데 그래도 이들 부부는 표정이 굳어지지는 않았다.
사진을 찍는 사이 아이들이 가게 앞에 우르르 몰려왔다. 아이들도 이들 부부가 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인 것을 아는데 “아저씨 와플 빵 네 개 주세요”한다. 임원빈 지부장은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에게 와플 빵1개씩을 아이들에게 전한다.
그 안에는 딸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정말 대화가 잘 된다는 것이 느껴졌다.
붕어빵과 와플빵 공존
이들이 노점 장사를 한 것이 벌써 10년째다. 대전에서 처음 시작해 6, 7년간 하다 보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고향 사람들이어서 인지 매출은 적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하다.
밀가루에 물을 얼마만큼 넣어야 반죽이 제대로 풀리는가 어떻게 하면 붕어빵이 바삭바삭하고 식어도 흐물 거리지 않을까 늘 연구한다. 처음 친구한테 이같은 비법을 배워 시작한 것이 10년째. 이젠 고수가 다 됐다.
처음 붕어빵에서 황금 잉어빵으로, 다시 이젠 와플 빵이 일반화 됐다. 이같은 장사 트렌드를 익혀 소비자들을 끌기 위해 이들 부부는 대전, 청주 등 도시로 나가 소비성향을 익힌다.
그리고 처음 비법을 가르쳐줬던 친구와도 상의하고 또 제품 회사를 방문해 꼼꼼히 따져 받아들인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붕어빵만 팔던 이들 부부는 겨울부터 와플 빵도 판매하기 시작했다. 붕어빵에 붕어대신 팥고물로 맛을 내고 와플 빵은 팥고물이 아닌 크림을 넣어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사랑을 받는다. 와플 빵을 개시하고는 손님들이 더 늘었다.
그래서 요즘은 와플 빵 시작을 잘했구나 생각하며 와플 빵 제조 방법을 배우기 위해 여기 저기 뛰어다닌 아내 도형숙씨의 어깨도 살살 두드려 준다. 이게 이들의 사랑 표현이다.
남편의 살가운 행동에 아내의 얼굴은 금방 발그레하게 물이 든다. 참 순수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원래는 어부이다
임원빈씨가 사는 동네인 회남 신곡2리는 대청호를 앞마당 삼은 마을이다. 대청호가 담수되기 전에는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며 생활비를 벌다 댐이 조성되면서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탔다. 그 때가 25살. 지금과 같이 물고기가 없는 때도 아니고 처음에는 쏘가리가 참 많이 잡혀 돈이 좀 됐다. 그래서 겨울 찬바람에도 물살을 가르며 노를 젓고 밤이 늦도록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지금은 배스와 블루길 등 외래 어종으로 인해 토종 물고기가 크게 줄었고 매년 치어 등을 방류해도 외래어종에 잡혀먹어 어부들의 그물에 걸리는 물고기가 크게 줄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빙어가 성어를 이뤘으나 이제는 아예 자취를 감췄고 쏘가리를 잡으면 횡재한 것이다.
그래도 임원빈씨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대청호에 그물을 넣고 붕어와 민물새우, 가끔 쏘가리도 잡아 식당에 판매하고 늦가을이면 보은 시내로 나와 봄까지 붕어빵 장사를 한다.
자리를 잡기가 어려워 아직 이르다 싶은 늦가을에 미리 나와 자리를 잡는다. 옛날에는 가게 주인들로부터 쫓겨다니기도 했고 자리잡기가 어려워 보은에서도 서너군데 자리를 옮겼었고 이제 겨우 ‘내 자리’를 잡았다. 봄이 올 때까지 열심히 붕어빵 장사를 한 후 임원빈씨는 다시 대청호로 돌아가 어부가 된다.
수화센터 생기는 게 바람
시내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곳에 이들 부부의 가게가 있으니 자연히 이곳은 지역 농아인들의 사랑방이다. 구들을 놓은 방은 아니더라도 오가다 들러 임원빈 지부장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죽전리 장애인협회 사무실까지 가지 않아도 이곳에서 지부장과 얘기 하다보면 누가 왔다갔다고 무슨 얘기를 하고 갔고 지금 문제가 무엇인가 등 농아인들에 대해 잘 알 수 있고 협회 돌아가는 것도 다 알 수 있다. 시내 가까운 곳에 임지부장 일터가 있는 게 정말 다행이다 싶다.
이들의 바람은 우리지역에도 수화통역센터가 생기는 것이다. 현재는 통역사가 필요할 경우 옥천이나 청주에 요청을 해서 통역사가 보은까지 와야만 하는 불편이 따르고 있다.
그래서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아니고는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기자가 취재를 할 때도 불편을 겪었으니 실제 이들이 겪는 불편이 오죽할까 싶다.
다행히 슬하에 둔 아들(관광경영학 전공) 하나는 말귀를 잘 알아듣는 일반인이다. 수화도 곧 잘하기 때문에 부모와 대화를 나누는데 별 어려움이 없어 부모의 입이 돼주고 손발이 돼주는 이들 부부의 희망이요 든든한 지원군이다. 그래서 더 살맛이 난다고 한다.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