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암, 그 편안함속으로
상태바
수정암, 그 편안함속으로
  • 보은신문
  • 승인 2008.01.0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허선주(이화여자대학교 약학대학 약학과 3학년)
일요일 이른 아침, 더구나 햇살이 눈부신 이렇게 좋은 주말 아침에 속리산으로 가는 길이 막히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 같은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속리산은, 큰맘을 먹고서야 여행지로 선택할 수 있는 곳이거나 사회 책에 두어줄 쓰여 있을 정이품송에 대한 이야기가 그에 대해 아는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보은이 고향인 우리 가족에 있어 속리산은 가벼운 산책 장소이자 단골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하다.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청주로 나와 살면서도 주말마다 ‘보은 가는 길’이 싫지 않은 이유는, 그 곳에 사랑하는 할머니가 계셔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보은’이라는 단어가 내게 주는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나선 속리산 나들이는 말티재를 넘는 순간부터 설레임으로 가슴 한구석이 못 견디게 간질간질하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법주사 옆에 위치한 작은 암자인 수정 암에 들르기 위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멋없이 난 콘크리트 길이 전부였던 그간의 도로와는 달리, 수정 암으로 향하는 입구부터는 흙 내음이 가득한 작은 산책로가 펼쳐진다. 지금은 나뭇잎이 무성하여 낮에도 어둑어둑할 정도로 녹음이 우거져 있긴 하지만 숲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 물에 반사된 아침 햇살은 여전히 눈부시기만 하다.

극락전을 비롯해 단촐하게도 건물 몇 채가 전부인 수정 암은 할머니 댁 같은 편안하고 한결 같은 모습이다. 마침 이곳에 계시며 밥을 해주시는 보살 님이 나오시다가 눈인사를 보내신다. 처음 수정 암을 왔을 때에도 이렇게 한없이 편한 느낌을 받았던가... 처음 속리산을, 그리고 수정 암을 찾아 온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지금이지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곳에 오더라도 편한 느낌이었다는 것은, 비단 이곳이 한산한 절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불가의 도는 제대로 알지 못하더라도 법당 툇마루에 일단 걸터앉게 되면 다시 일어나서 집에 가기가 영 싫어지는 게 늘 문제다. 이곳에 앉아서 바라보는 전경은 인공 구조물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 바위를 깎아 내린 듯한 절벽 아래 담대하게 자라 있는 커다란 나무들이 바로 수정 암, 그리고 속리산, 더 나아가 보은만이 가지고 있는 당당함이자 매력인 것이다.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느낌, 이 느낌이 바로 나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끄는 힘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툇마루에 앉은 채로 손을 뻗어 열어 놓은 불당 문을 만져보았다. 지금은 바람에 문이 닫히지 않게 문짝을 멋없이 묶어 놓은 상태이다. 하지만 이 법당 어간의 창호야말로 이 절의 보물이자 매력 포인트이다. 다른 창호는 대부분 井자살 창호이지만, 이 어간의 창호는 활짝 핀 꽃 모양을 조각한 꽃살 창호로 되어있다. 꽃의 모양은 아름답거나 화려하지도 않고, 칠도 약간 바랜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누군가 수정 암, 그리고 법주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찾으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오래된 문짝을 붙들 것이다. 이 보물 같은 창호가 보이지 않게 문을 연 채로 묶어버린 누군가를 원망하며 문을 반쯤 닫아 놓고는 다시금 창호를 더듬어 만져보았다. 과하지 않지만 너무 수수하지도 않은 앞마당의 풍경은 이것, 꽃창호살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보리수가 서 있는 앞마당의 측면으로는 법주사로 갈 수 있는 샛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얼마간 걷다가 다시 돌아온 동안에도 절은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다. 역시 이곳의 매력은 이 고요함이다. 함께 이어져 있는 법주사는 수정 암과는 달리 늘 관광객으로 붐빈 다. 이 단출한 곳과는 다르게 법주사는 기념품 가게도 절 안에 있고, 법당 앞마당도 넓으며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거대한 불상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절에 부족한 단 한가지가, 바로 수정 암의 가장 큰 매력인 고요함이자 편안함인 것이다.

나의 고향 보은은 이러한 수정 암을 닮았다. 수수한 듯 하지만 청아하고, 단촐한듯하지만 당당하다. 화려한 주변의 절경 속에 담대히 자리 잡은 수정 암의 모습처럼 법주사만이 가진 웅장함, 미륵불상이 가진 화려함, 각종 관광코스가 가져다주는 즐거움 모두 보은을 한층 빛내주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들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보은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내 고향만이 가진 이러한 편안함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금빛을 띤 미륵불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보은에는 꽃창호살과 같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소중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작고 수수하더라도 그 안에서 수줍지만 당당한 미소를 짓는 나의 고향은,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고향을 찾은 듯한 편안함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조용한 수정 암을 뒤로하고 속리산을 내려올 즈음에는 햇살이 좀 더 따가워진다. 오늘도 한 여름의 햇살을 듬뿍 머금고 그 자리에 당당히 서 있을 작은 절 수정 암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나의 고향, 보은을 떠올려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