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위해 바친 장렬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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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위해 바친 장렬한 죽음
  • 보은신문
  • 승인 2007.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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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선생과 함께 순절한 의사 김성원
김성원의사는 경주김씨로 자는 경구요, 호는 송촌이니 중공조참의 희련의 아들로 1565년 (명종 20년)에 보은읍 성족리에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년)에 왜적이 침략해와 스승인 조헌선생이 왜적을 치고자 의병을 널리 모집하니, 의사는 쾌히 스승의 의진으로 달려가고자 했다.

하지만 늙으신 부모님이 살아계신지라 부인이 이를 말리자 “사람이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더욱이 지금 왕께서 피난 중이거늘 어째 사사로운 개인 사정을 돌볼 수 있겠는가”라면서 의병에 참여했다.

조헌의 의병은 먼저 피난중에 있는 왕을 따라가 구하고자 했으나 왜적이 청주에 집결하여 장차 호남을 유린코자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계획을 바꿔 먼저 청주로 진격하여 적을 크게 무찌르고 금산에 진격하여 적과 싸우게 됐다.

금산의 서쪽에서 하루종일 적병과 싸웠으나 적의 수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의진의 화살이 다 떨어지고, 구원하러 오는 군사도 없어 중과부적으로 조헌선생 이하 의병들은 드디어 왜적과 접전중에 모두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의사는 끝까지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헌선생과 함께 순절했다.

의사가 집을 떠날 때 부인은 울면서 “만약 불행한 사태가 오면 알아볼 수 있도록 옷과 허리띠에 표시나 하시고 가시라”라고 하였다.

하지만, 의사는 “평생 스승과 벗들과 함께 있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고, 지금은 충의를 위하여 같이 죽기로 맹세한 일이다. 대장부가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의당 모래벌판에 시체를 버릴 것이지 어찌 구구하게 그 시체를 거둘 것을 기대한단 말인가”라고 말하고 집을 떠났다.

의사가 목숨을 잃은 나이는 28세였다. 의병에 합류하기전 의사가 한 얘기처럼 그의 시체는 찾을 수가 없었다.

후일, 이들이 순국한 자리에 의총을 만들고 문공경 윤근수가 비를 세웠고, 특히 의사의 이름을 크게 써 넣었다.

의사의 묘는 보은읍 성족리에 있는바, 시체를 찾을 길이 없어 그의 부인 청도 박씨 무덤에 의사의 옷과 갓을 함께 묻어 놓았다.

1717년(숙종 43년)에 의사의 충절을 기리는 정례를 명하고,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의사 김성원 전을 편찬하여 순국정신을 기리도록 했다.

이병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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