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읍 종곡리 출신 김가기 선생
한집안에서 충과 얼, 그리고 의로운 죽음이 있다는 이야기는 고금을 통해 들은 바가 없다.“남편의 죽음은 충절(忠節)이요, 아내의 죽음은 열절(烈節)이며, 며느리의 죽음은 의절(義絶)이다”
이 말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더불어 우리나라 예학의 쌍벽으로 치는 정경세(鄭經世) 선생이 김가기 선생의 가족 3인의 장렬한 순국의 소식을 듣고 전한 이야기다.
김가기 선생은 경주김씨로 자는 사원(士元), 호는 일구당(一丘堂)이니 1537년(중종 32년)에 김제 군수 천부(天富)의 다섯째 아들로 보은읍 종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석학대곡 정운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밝았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스승 곁에서 슬하에 자식이 없는 스승인 고모부의 시중을 들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1579년(선조 12년), 스승이 자신의 뒷일을 부탁하면서 벼슬길에 나가라고 권하고 세상을 뜨자 선생은 그해 생원시를 거쳐 노성현감이 되었다.
선생은 “만약 벼슬아치가 백성을 외면하고 자신의 영달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라를 해롭게 하는 도적이요, 백성의 적이다. 관직에 임하면 밝고 바르게 일을 처리할 것이며 ‘항상 겸허한 자세로 백성을 위해 그들과 가깝게 대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사랑하는 것을 제일로 삼아야 한다”라고 자신을 경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벼슬에 뜻이 없던 선생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와 스승 대곡의 글을 모아 문집을 편찬하는데 몰두했다.
1597년(선조 30년), 왜적이 침범하여 그해 음력 9월17일, 선생의 마을까지 쳐들어와 약탈을 시작했다. 그러자 선생은 환갑노인으로 적의 괴수 앞에 나가 그들의 만행을 꾸짖었다.
난폭한 적은 칼로 위협했지만 조금도 굽힘이 없이 대항하자 적은 칼로 선생을 베려고 했다. 이를 본 선생의 부인 전주유씨는 적의 칼날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 남편을 대신하려 했지만 한 칼날 아래 부부가 동시에 순절하고 말았다.
또한, 선생의 며느리 고령신씨는 같은 날 피난을 가다 왜적을 만나자 적의 칼을 빼앗아 적을 죽이고 적의 손에 더럽혀진 자신의 두 유방을 도려내고 자결하였으니, 하루에 일가족 셋이 나라와 남편을 위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년), 나라에서는 선생의 순국을 높이 치하하여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봉하는 한편, 며느리 고령신씨에게는 의열이라는 정려를 명하여 선생 일가의 높은 정신을 기리도록 했다.
이병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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