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가 찾아와 둥지를 튼 덕골마을
상태바
백로가 찾아와 둥지를 튼 덕골마을
  • 송진선
  • 승인 2007.08.3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탄부면 덕동1리
우리나라 기후가 아열대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장마철이 아닌 우기로 바꿔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나올 정도로 기후변화가 뚜렷하게 느껴진다.

군내에서는 가장 넓은 벌판, 들을 갖고 있는 탄부면. 그곳에서도 면의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탄부면 덕동1리, 덕골을 찾았을 때 장대비가 한 차례 보은 땅을 흔든 후였다.

한창 이삭이 패여 고개를 약간 숙인 벼며, 고추 등 농작물은 쨍쨍 내리 쬐는 햇살을 받아야 통통하게 여무는데 비가 너무 오니까 살이 제대로 오를까 걱정이 앞섰다.

처서에 비가 오면 그 해 농사는 흉작이라고 어르신들의 하는 말이 생각이 났지만 처서가 지난 지금 이렇게 쏟아지는 비도 그리 반갑지만은 않겠다 싶다.

비 좀 그만 내리길 바라며 찾은 덕동1리는 자연마을 명으로 언덕에 자리잡아서 덕골이라 불렸다고 하는데 지명의 유래가 썩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다.

언덕에 자리잡았는데 왜, 어떻게 덕골이라고 불렀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이기봉 노인회장은 옛날에 마을이 고개 안쪽에 자리해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외풍을 막아주고 또 이곳에서 누가 특별히 덕을 나눠주는 것도 아닌데 나갈 때는 마을 덕을 보고 잘돼서 나간다고 해 옛날 어르신들이 덕골이라 불렀다고 설명했다.

탄부면 중심지로 면내 각지에서 오가기 쉬워 탄부초등학교를 세웠다고 하는 탄부면 덕동1리는 덕골과 학교가 위치한 장흥, 즉 새터말로 이뤄져 있다.

장흥은 이기봉 노인회장의 아버지가 처음 집을 지어 살면서 마을이 오래도록 흥하라며 장흥(長興)이라고 지었는데 덕골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 둘 넘어오고 또 다른 곳에서

이주해오면서 가구 수가 늘어 마을이 형성되자 주민들이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새터말이라 불렀다.

현재 덕동1리는 양광선(45) 이장과 이기봉(72)노인회장, 권숙제(58) 부녀회장, 김명수(35) 부녀회장 등 41가구 8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 이명백 장군 묘소위치
가평이씨 집성촌인 덕골은 전체 가구의 60% 정도가 가평이씨 이다. 과거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80% 이상이 가평이씨일 정도로 덕골은 이씨 집성촌이다.
현재 살고 있는 가평이씨들은 조선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워 전사한 이명백 장군의 후손들이다.

이기봉 노인회장이 13대 직계 후손으로 현재 이명백 장군의 16대 손까지 번창해 있다. 조중봉 선생의 수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중봉 선생이 칠백의사를 이끌고 왜적과 싸울 때 이명백 장군은 어머니가 편찮아 고향인 덕골로 낙향했다.

그리고 이명백 장군인 고향 보은에서 활동, 적암에서도 왜적과 싸워 승전하고 청주성 탈환에도 기여하는 등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현재 덕골에는 탄부초등학교 뒤편 야산에 이명백 장군이 묘소와 함께 공적비가 있다. 당초 마로면 원정리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기고 신도비도 세웠다.

또 이명백 장군의 할아버지인 이형선공을 기리는 부조묘가 있다.  충훈사라 불리는 이것은 당초 충남 연산에 있던 것을 1890년 고종 2년에 덕골로 이전했다.

현재 마을에는 집성인 가평이씨와 관련된 전설이 있기도 하다. 마을 뒤 북쪽 산에 삼성혈이라 불리는 굴이 있는데 청송심씨, 가평이씨, 김해김씨 3개 성씨의 집안 식구들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왜적의 눈을 피해 살아남았다고 한다.

굴을 말할 때는 삼성혈, 바위를 말할 때는 삼성암이라 불리기도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곳이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인데 신라장수 3명이 이 굴에서 피난을 했다고 해서 장수굴이라고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주민들은 이곳을 삼성혈이라 부르고 있다.

세가구가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바위가 지붕과 같이 덮인 굴 안쪽에 문짝처럼 보이는 돌문이 막혀있는데 어른들이 밀면 약간 움직이나 문이 열리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것으로 봐서는 문안에 숨어서 피난을 했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추측을 하고 있다.
이렇게 기이한 삼성혈은 탄부초등학교 학생들의 견학지 이기도 했다. 나무를 땔감으로 사영했을 때는 주민들도 안 가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자주 가보았지만 연탄을 때고 기름보일러로 바꾼 후에는 마을 주민들도 가보지 않아 지금은 일반인들이 삼성혈이 있는 산을 등산하지만 숲이 우거져 외부에서는 찾지 못할 정도다.

# 탄부초등학교 위치
탄부면사무소와 지서 등 옛날부터 관공서가 잡중된 곳이 그 지역의 중심지 또는 번화가로 역할을 했으나 탄부면은 면사무소와 지서, 농협 등 관공서는 진미 즉 지금의 하장1리에 위치해있으나 학교만큼은 덕골에 세웠다.

왜냐하면 사방팔방에 흩어져 있는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학교를 세울 터도 문제여서 당시 덕골에서는 땅 부지인 이기봉 노인회장의 아버지인 이기용씨와 이기용씨의 팔촌 동생인 이봉용씨가 땅을 희사해 학교가 들어 설 수 있었다.

이후 학생수가 많고 면내 전체 학생들이 이 곳으로 오기가 불편하자 분가를 했는데 그곳이 바로 보덕 초등학교와 사직초등학교이다.

그러나 학생수가 점차 줄어 학교 유지가 어렵게 되자 분구해 나갔던 보덕초등학교와 사직초등학교는 폐교되고 현재는 원 학교인 탄부초등학교만 남았다.

탄부초등학교에도 농촌지역 여느 학교처럼 학생수가 적어 사실상 아이들 소리로 시끌벅적했던 옛날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도 주민들에게 탄부초등학교는 지역의 자랑으로 남아있다.

# 백로 서식지
마로면 관기리에 서식했었던 백로가 한동안 사라졌었다. 백로가 서식했던 곳의 나무들이 백로의 배설물에 거의 말라죽다 시피 했었다. 과연 이디로 갔을까 주민들도 궁금해했는데 20여년 전 탄부면 덕동리 학교 옆 산에 둥지를 틀었다.

관기리를 뜬 백로인지는 잘 모르나 주민들은 희고 깨끗해 선비를 상징하는 백로가 덕골에 찾아온 것을 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바로 앞 보청천 물이 맑아 다양한 물고기가 서식하고 개구리까지 백로의 먹이들이 풍부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선비를 상징하고 이슬만 먹고 자랄 것 같은 백로의 먹성이 얼마나 좋은지 물고기는 물론 우렁이, 개구리, 뱀까지 먹어치운다.

육식을 한 탓인지 배설물은 초식동물과는 달리 산성이 강해 나무까지 버텨내질 못한다.

현재 이곳도 많이 죽어 둥지가 위태로웠기 때문일까 그동안 둥지를 틀었던 곳에서 약간 학교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로 서식지로 알려지면서 대학교수, 조류학자, 사진작가 등이 마을을 찾아 하루 종일 백로를 촬영하기도 한다.

어떤 조류학자는 관찰을 하는 것인지 매년 와서 촬영을 할 정도였다.

모내기를 하고 나면 논에 들어가 어린 모의 뿌리가 활착되기 전 짓밟아 죽이기도 하지만 가을에 강남으로 갔다가 봄이면 다시 오는 백로를 주민들은 반가워한다. 농작물에는 다소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큰 피해도 아니고 마을에 좋은 것을 주는 길조이기 때문이다.

# 외들 무 전국 명성
덕골은 벽지와 함께 무를 생산한은 곳으로 유명했었다. 물 빠짐이 좋아 무 농사가 잘됐다. 당시에는 무를 안 심는 집이 없었다. 보리를 베어내고 무를 심었으니 2모작인 셈이다.

외지사람들이 덕골을 찾아와 소 질마에 가득 실어 사갔고 구루마가 나오면서 구루마에 한가득 사갔다. 강원도 대관령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면 외지 상인들이 ‘차 떼기’로 사가는 것처럼 덕골 무를 사가는 풍경이 꼭 그러했다고 주민들은 회고했다.

그러다 삼가 저수지가 축조되고 통일벼가 나오고 밭이 논으로 변하면서 무를 팔아먹고 살았던 주민들은 저수지, 통일벼 바람에 다들 먹고 살만해졌다.

논이 많은 덕골은 두지가 가득 찰 정도로 벼 가마가 가득 쌓였다. 벼농사가 대접받던 시절 안 먹어도 배부르던 시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밭작물이 그나마 소득이 높고 벼는 소득이 높지 않아 벼가 주업인 덕골은 소득을 높일만한 작물이 없는 형편이다.

밭은 산에 붙어 있는 팔 밭 정도이고 그곳에서 고추를 재배하는 정도다. 가구당 소득이 높지 않다는 얘기다. 그래도 주민들은 오순도순 정답게 화합하며 살기좋은 마을을 만들어 가고 있다.

7억이 들어가는 정주권 사업으로 마을 상하수도 정비와 진입로 확포장 등의 사업을 펼치고 아직 비포장 상태인 새대들 농로와 학교 농로 포장을 희망하면서 소득을 높일 수 있는 작물이 뭘까 고민하면서 부자마을이었던 옛 화를 되찾기 위해 마을 주민 모두가 합심했다.

길조로 여기고 있는 백로가 군내 그 많고 많은 마을 중에 그냥 덕골 학교산에 찾아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가 설핏 기울면 마을 앞 보청천 물도 하얗게 빛나고 말없이 흐르는 그 물은 예나 지금이나 마을을 적셔주는 것처럼 마을이 영원히 번성하도록 기원해본다.

<새로쓰는 마을 이야기(11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