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100)-수한면 묘서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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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탐방(100)-수한면 묘서1리
  • 송진선
  • 승인 2007.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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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백 여호가 넘어 면내 가장 컸던 마을약
묘서리(畝西里)의 한자어가 참 어렵다. 무슨 뜻일까? 찾아보니 묘자는 땅 넓이의 단위로 곧 30평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왜 마을 이름에 30평 단위를 일컫는 한자를 썼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못이 있던 못골 서쪽에 마을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에 취재를 하면서 마을 이름의 한자어 전환의 필요성도 느껴졌다.(편집자 주)

묘서리는 남쪽 검운산에서 발원한 개울물을 따라 마을이 형성돼 있다. 수한면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삼승면, 남쪽은 거현리, 북쪽은 소계리와 접해 있다.  본래 못골 서쪽이 되므로 묘섯골 또는 묘서동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묘동리, 중리를 병합해 묘서리라 했다.

현재 묘서 1리 마을은 묘서라는 지명의 어원인 묘서동과 물안이, 버드쟁이, 주막거리, 못골로 이뤄져 있다.

마을 앞 흐르는 하천인 거현천 변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꽉 들어차 지금 국도 37호선이 지나는 곳에서 마을의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버드쟁이라고도 불렸는데 80년 수해에 이어 98년 수해를 겪은 후 수해 상습지인 이곳에 하천 정비사업을 펼치고 경지정리 사업도 펼쳤는데 이 때 하천에 있던 버드나무들이 다 없어졌다.

마을 이름의 어원이 됐던 단서들이 다 없어진 것이다. 한 그루 남아 있었는데 이 마저도 벼락을 맞아 죽어 지금은 하천 변에 버려진 상태로 있다.

옛날에는 물이 워낙 깨끗해 뱀장어도 살고 메기도 흔해 동네 아이들이 족대를 들고 물고기를 잡기도 했고 나물로 씻고 빨래도 이곳에서 했는데 생활하수 등으로 하천이 많이 오염됐고 또 하천정비 사업 이후 물이 고여 있을 새도 없이 빠져 버려 물고기가 살 수 없고 더 이상 빨래도 할 수 없는 곳이 됐다.

주민들이 안타까워 하는 부분이지만 그나마 하폭을 넓히고 수해를 입지 않은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마을에 큰 영향을 준 하천은 예전에는 돌다리여서 비만 오면 어른들이 자녀들을 업어서 내를 건너 학교에 보냈다. 그 뒤 지금 마을회관으로 쓰는 곳 앞 쪽에 새마을 사업으로 동네 주민들이 밀가루 부역을 서서 콘크리트 다리를 놓았고 지금 놓인 것은 그 뒤 다시 놓았는데 비가 와도 물을 건너는 일이 걱정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지역주민과 출향인들까지 포함한 상조계는 마을 화합과 주민을 위로하는 위안잔치를 베풀고 안종찬 민속촌 사장을 비롯해 미국에 거주하는 안상범씨 등 출향인들이 고향을 찾을 때마다 경로당을 후원하고 기금을 희사하는 등 고향사랑을 보여주고 있으며 부녀회에서도 효도잔치를 여는 등 단합력을 과시하는 묘서1리는 42가구에 100여명이 살고 있다.

안천용(61) 이장과 한길현(70) 노인회장, 김광선(59) 새마을 지도자, 엄순오(61) 부녀회장, 안상운(48) 총무는 마을발전을 위해 주민 화합을 위한 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 면내 가장 컸던 마을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을 면소재지로 부른다. 수한면사무소는 후평리에 있지만 묘서1리는 수한면소재지나 다름이 없었다.

단위농협 시절 농협연쇄점도 있었고 1914년 4월 왜정시대 보은경찰서 수한주재소가 있었고 양조장, 약방, 정미소, 이발소 등이 자리했었다. 지금으로 봐도 장이 서는 곳에서 볼 수 있는 기관 및 상점들이 자리했었던 것이다.

특별히 장이 서는 날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고이니 막걸리도 팔고 국밥도 팔던 주막도 많았고 아예 주막거리가 형성됐었다. 지명에도 주막거리가 나올 정도다.

그만큼 묘서1리는 시장경제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진 마을이었던 것이다. 장이 서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면사무소가 있던 소재지도 아닌데서 이같이 경제 요충지 역할을 한 곳은 아마도 보은군내에서는 묘서1리 뿐이지 않을까.

산업화로 인해 많이 없어졌지만 지금도 마을에는 지서라고 불렀던 치안센터가 있고, 보건진료소가 있으며 정미소도 자리하고 주유소, 식당 등이 유지되고 있다. 당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동안 사용했던 건물이 낡아 현재 신축중인 보건진료소는 묘서1리와 2리를 비롯해 소계, 광촌, 거현1,2리까지 6개마을 주민들의 건강 지킴이로 있으며 정미소 또한 이들 마을의 곡식을 정미하는 곳으로 주민들에게 매우 요긴하다.

한때 100호가 넘었을 정도로 큰 마을이고 수한면 내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면소재지도 아닌데서 마을 규모가 컸으니 당연히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아마도 면 소재지는 아니지만 경제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게다.

사람 사는 집이 100호가 넘으니 마을이 얼마나 컸을까. 교통 발달이 안되고 산업화가 활발히 이뤄지지 않아 대부분이 농촌에서 농사를 지었던 것이 당연했을 때의 일이니까 마을 주민들은 다른 마을도 묘서1리처럼 가구 수가 100호가 넘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100호 넘는다는 것이 그리 큰 소식은 아닌 것으로 취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누구 네도 떠나고 누구 네도 떠나고 누구네 집 자식도 결혼해서 도회지로 나가고 누구 네 혼자 살던 어르신이 돌아가시니 빈집이 되고 이렇게 100가구 넘던 마을은 자꾸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고 줄고 해서 남은 42가구 주민들은 그래서 더욱 정을 쌓으며 화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농촌 공동체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안씨 집성촌
묘서리는 군내 몇 안되는 집성촌 중의 하나로 안씨 집성촌이다.
과거 가구의 80%이상이 안씨로 이뤄졌었지만 지금은 50%정도로 줄었지만 여전히 집성촌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집성촌은 담을 사이로 이웃하고 있는 이웃사촌이다. 가깝게는 사촌일수도 있고 육촌지간일수도 있고 당숙 아저씨 일수도 있다. 그야말로 말만 이웃사촌이 아닌 성씨까지 같은 진짜 이웃사촌인 것이다.

그러니 행동거지도 조심스럽고 말도 조심해야 한다. 아마도 집성촌이 아니면 개인들의 행동거지가 더 자유스러웠을 것으로 보인다.

남자들 세계에서 흔히 사회 나이로 위아래 10살까지는 친구로 트고 지낸다 한 동네에서도 어릴 적에는 몰라도 커서 한두 살 차이는 친구로 지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묘서1리는 애초부터 이같은 것은 상상도 못한다.

그런가하면 동네에 길사나 흉사가 있으면 집안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나서서 같이 기뻐하고 같이 가슴 아파한다. 그런데 집성촌이니까 이 동네에서는 길사나 흉사가 모두 집안일이다.

# 대추 고을이었다
묘서1리의 또 하나의 특징이 바로 대추나무 집안 서식지 였다는 점이다.

대추하면 보은인데 그 중의 한 곳으로 묘서리가 꼽혔던 곳이다.  1950년경까지만 해도 감나무가 앞마당, 뒷마당 할 것 없이 울안에도 몇 그루 있고 밭둑에도 있었듯이 동네 전답 면적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을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양터골로 불리는 골 안에 특히 대추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대추나무 대신 배나무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큰 것은 어른이 두 팔로 안아야 할 정도의 아름드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동네에서 단 한 그루도 찾아볼 수가 없다. 대추나무 빗자루 병으로 인해 대추나무가 전멸했다.

지금 보은군이 시책적으로 대추나무 육성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그 당시의 아름드리 대추나무가 아직도 마을에 있었다면 충분히 보호수로 지정됐을 것이고 아마도 사업의 상징적 의미로 특별 사업이 추진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으니 마을로서는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대추나무와 함께 담배를 주로 재배했던 주민들은 지금은 논농사 외에 고추도 재배하고 노지 오이 재배, 일부 사과와 배, 표고버섯을 재배하며 농산 소득을 얻고 있다.

# 마을회관 신축 주민숙원
과거 농협연쇄점으로 사용했던 건물을 마을에서 매입해 그동안 마을회관으로 사용했던 주민들은 지금은 그마저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지붕이 낡아 비가 새기 때문이다.

마을에 경로당이라고 하나 공공건물이 있어서 마을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회의장소로 사용하지만 장소가 워낙 좁아 마을 주민들이 한자리에 앉을 수가 없어 회의를 나눠서 해야 할 정도다.

마을에 번듯한 회관 하나 건립하는 것이 주민들이 제일 바라는 것이다. 현재 마을회관 부지는 하천부지여서 불하해주면 마을에서 매입하겠다고 충북도에 요구했으나 불허방침으로 떨어져 주민들이 반발하고 있다.

하천정비 시에는 상당부분의 논이 편입되는 것을 모두 승인했는데 정작 마을회관 자리는 하천으로 사용하지도 않고 또 하천부지를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매각하라는 것인데 주민들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2005년 마을 앞 국도변에 팔각정자와 쉼터, 운동기구 등이 갖춰진 묘서공원이 들어서고 다리가 신축돼 마을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어 이제 마을회관만 갖추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할 정도다.

마을 발전을 위한 논의도 하고 주민들의 살아가는 얘기도 나눌 수 있는 마을회관이 주민들의 소망대로 그곳에 지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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