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91)-내북면 아곡리,용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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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탐방(91)-내북면 아곡리,용수리
  • 보은신문
  • 승인 2007.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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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산 아래 한 마을 주민처럼 살아가는 아곡, 용수
따뜻한 봄날을 맞이하려면 좀더 인내심이 필요한가 보다.

아곡리와 용수리를 찾은 날은 제법 쌀쌀한 날씨에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보은∼창리 간 19번 국도 변에 위치한 아곡리와 용수리는 지금은 폐교된 내북초등학교 아곡분교장 뒤로 작은 하천을 따라 마을이 형성돼 있다.

한 곳에 모여 있어 눈으로 보기에는 한 마을처럼 보이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아곡리와 용수리로 분리되어 있는 곳.

도로변에서 보면 마을이 작은 듯 해도 막상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면 하천을 따라 길게 늘어선 많은 농가들이 마을 규모가 크다는 걸 말해준다.

취재를 가기 전 예전에는 두 마을이 한 마을이었다는 말을 듣고 그래도 마을이 서로 떨어져 있긴 하겠지 생각하며 나름대로 마을 모습을 그려봤는데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행정구역은 분리돼 있어도 여전히 한 마을 한 주민으로 살아가는 아곡리와 용수리 주민들.

아곡리 마을 봉사자로는 신희동(39) 이장과 우광수(71) 노인회장, 박영숙(40) 부녀회장, 박희성(57) 새마을 지도자가 있다.

용수리 마을 봉사자로는 김춘식(61) 이장과 신덕호(75) 노인회장, 우분예 부녀회장(54), 김근수(39) 새마을 지도자가 있다.

# 80년 수해 이후 아곡, 용수로 분리
아곡리는 본래 청산군 주성면 지역으로서 아차산 밑에 있어 아차실, 아치실 또는 아곡(峨谷)이라 하였는데 1906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보은군에 편입되어 주성면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 회인군 동면의 신흥동 일부를 병합하여 아곡리라 하고 내북면에 편입되었다.

용수리는 본래 회인군 동면 지역으로 1914년 수적동, 용흥동과 보은군 내북면의 상궁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흥과 수적의 이름에서 각기 한자씩 따라 용수리라 하고 보은군 회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46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내북면에 편입되었다.

회북면에 속해 있던 용수리는 뒤늦게 내북면에 편입되어 옛날에는 용수리 학생들은 회인으로 아곡리 학생들은 창리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용수리는 회인뜸 아곡리는 청산뜸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마을이 아곡리로 통폐합 된 후 80년 수해이후 다시 두 지역으로 분리가 되었다.

마을 안을 흐르는 하천을 경계로 위쪽(북쪽)은 아곡리, 아래쪽(남쪽)은 용수리로 나뉜다.

아곡리는 용수리보다 규모가 작아 27호가 사는 반면 용수리쪽은 70여호의 농가들이 밀집해 있다.

행정구역상 다른 마을이 되긴 했어도 생활하는 데 있어서는 전과 다름이 없다.

아곡리와 용수리는 마을 명의의 임야와 전답을 공동 관리하고 마을 기금도 함께 마련하며 마을 입구 용수리 쪽에 있는 마을회관도 '아곡, 용수 마을회관'이란 현판을 걸고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한다.

마을 이름만 다를 뿐이지 두 마을 주민들은 모든 걸 함께 공유하고 상부상조하며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며칠 뒤 하천과 물탱크를 청소하고 폐품 수집을 하기 위해 날을 정했는데 그 날도 아곡, 용수 주민이 다같이 참여할 거라고 했다.

따로따로 하면 인심이 야박해져서 안 된다며 뭐든지 함께 해야 한다는 용수리 김춘식 이장의 말대로 그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아곡리와 용수리 주민들은 서로 화합해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 왜군이 그냥 지나친 후 아차 했다는 아치실
아치실로 불리었던 아곡리와 용수리.
본래 아치실은 구룡산 아래 소룡골이란 골짜기에 있었던 마을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모든 마을을 습격하였는데 마을 앞에 숲이 울창하여 잘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간 후 뒤늦게 지나친 것을 알고 아차 빠뜨렸다고 후회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그 뒤부터 조상들이 '아차실'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변하여 '아치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외지에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7가구로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보다는 전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주민들이 떠나고 없는 빈자리를 따뜻하게 채워준다.

아곡리 신희동 이장은 마을에 사람이 없는 것보다야 한 사람이라도 더 모여 북적북적한 게 낫지 않겠냐며 외지에서 이사오는 사람들이 원주민과 잘 어울려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고 했다.

예전에는 100호가 넘었었다고 하는데 그런 날이 다시 오지 말란 법도 없을 것 같다.

두 마을은 출향인과의 유대관계도 좋아 출향인들이 고향을 찾아 마을 어른들께 경로잔치도 열어주는가 하면 마을 애경사 때마다 고향을 찾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 전통을 지키는 마을
아곡리와 용수리는 예전부터 산신제와 수구막제를 지내는 등 옛 조상들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구룡산에 있던 산제당은 오르내리기가 힘들어 마을 뒤쪽에 산제당을 따로 마련해 매년 정월초 산신제를 올리며 마을 수호신인 돌장승에도 마을의 안녕과 가족의 건강을 빌기 위해 장승제를 올리는 수구막제를 지낸다.

제를 올린 역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연대를 추정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됐으며 마을의 돌장승 역시 오랜 시간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지켜왔다.

장승은 74년경 상궁리 입구에 설치됐던 것을 국도 19호선 확포장으로 인해 마을 입구로 옮겨와 남자 장승은 오른쪽, 여자 장승은 왼쪽에 설치했다.

그런데 4년 전 누군가 장승 2기를 모두 훔쳐가 버렸다. 그동안 마을 수호신으로 여겨왔던 장승을 주민들은 꼭 찾을 수 있길 바랬으나 결국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마을 입구 양쪽에는 원래 있던 장승을 도난 당한 후 새로 세운 장승이 마주보고 서 있다. 남자, 여자가 다 있는 쪽과 달리 다른 한쪽에는 남자 장승만 있어 이상하게 여겼는데 여자 장승 하나를 또 도둑맞았다는 것이다.

전에는 땅 밑을 20㎝이상 파서 묻은 장승을 뽑아갔기 때문에 시멘트로 바닥을 다져 장승을 붙여놓으면 안전할 줄 알았던 주민들은 누군가 장승을 시멘트 바닥에서 흔적도 없이 잘라간 걸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기가 막히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짝 잃은 돌장승을 보며 내 양심은 가슴에 제대로 박혀 있는지 돌아보게 됐다.

# 농로포장과 수로정비 시급
행정구역이 상궁리에 속해 있는 폐교된 아곡분교장쪽 농경지는 아곡, 용수 주민들이 농사를 짓는곳이다.

농로 포장과 수로 정비가 미흡해 농사를 짓는데 많은 불편함이 따른다고 한다.

문제 개선을 요구했지만 토지가 상궁리 지역이다 보니 행정상의 문제로 민원 처리가 어려워 주민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바쁜 농번기에는 농촌이 시끌벅적 농민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경운기를 몰고 삽을 들고 논과 밭으로 향하는 아곡, 용수 주민들이 좀더 편한 환경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이 하루빨리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없어지는 게 있는가 하면 변하는 것도 있고 새로 생겨나는 것도 있다.

나쁜 건 다 없어지고 좋은 것만 생기면 좋겠지만 세상일이 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꽃샘추위가 지나가고 나면 날이 금방 따뜻해질 줄 알았는데 싸늘한 날씨가 계속되는 가운데 3월도 이제 일주일만 남겨 놓고 있다.

마을 안을 흐르는 하천은 아곡리와 용수리를 나누는 경계지만 주민들에게 그것이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 듯 보였다.

밖에서 보이는 모습대로 한 마을 주민처럼 서로 보태고 나누며 살아가는 주민들.

겨울철 마을회관에서 공동 생활을 할 때 쌀독이 비면 누군가 쌀을 가져와 독을 가득 채워놓고 그걸 다 먹으면 또 누군가가 채워놓고, 그래서 주민들이 겨우내 먹은 쌀이 12가마나 된다고 한다.

그들에게서 훈훈한 인심처럼 좋은 것을 지켜나가는 법을 배운다.

김춘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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