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가던 나그네들의 쉼터가 되었던 곳
구정이 열흘 앞으로 다가온 2월 초순, 햇살이 봄볕 부럽지 않을 만큼 따사롭다.조금 있으면 허허 벌판 들녘에도 꽃이 피고 새싹이 자라 봄 내음이 물씬 풍길 것이다.
달산 2리 마을 앞에 펼쳐진 겨울 들녘은 아직 봄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풍년든 가을 들녘을 보는 것처럼 풍요로움이 느껴졌다.
가습은 산아래 자리한 다른 마을들과 달리 들판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사방에 들이 펼쳐져 있다. 동으로 삼승산이 서쪽으로 금적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 안아주고 있으나 마을 가까이에는 산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사방이 들이어서 그런지 넓은 농경지와 마주치면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 좋은 경험을 하기도 한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길옆으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돌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전부터 있었던 소나무가 경지정리로 없어지고 그것을 대신해 돌비석을 세운 것이다. 6년 전까지는 일년에 한번 주민들이 마을을 위해 고사를 지냈었다고 한다.
오랜 옛날에는 지금의 자리에 마을이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경주 김씨, 남원 양씨, 인천 이씨, 삼성이 마을 앞들 여기저기에 산재해 살았었으나 홍수 피해를 자주 입어 남원 양씨는 중가습(상가리)으로, 인천 이씨는 달뫼(달산1리)로, 경주 김씨는 현재의 자리 가습으로 이주해 살았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담안밭, 텃밭, 온돌, 집터 등 다양한 증거물들이 많았으나 1, 2차 농지정리 사업으로 없어지게 되었다.
경주 김씨 집성촌으로 마을을 형성했던 가습에는 현재 경주 김씨가 30여 호 남아 있으며 13성씨가 평화롭게 마을을 일구어 간다.
달산 2리는 동네가 앞들 여기저기 분포돼 있을 당시 마을을 둘러싼 주변 숲이 울창해 그것을 보고 아름다운 숲속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가숲이라 하였는데 옛 어른들이 옳고 착한 것만 배우고 가르치란 뜻으로 옳을 가(可)자 익힐 습(習)자를 따서 가습(可習)이라 지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은 달산 2리의 토질이 점토질로 워낙에 질어 밖에 나가 한 걸음만 걸어도 신발에 흙이 잔뜩 묻을 정도여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옹기나 도자기용으로 이런 흙을 사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45호 100여명의 주민이 생활하는 달산 2리 마을 봉사자로는 염수환(50) 이장과 김홍찬(72) 노인회장, 정경식(65) 부녀회장, 김용해(46) 새마을 지도자가 있다.
# 한때는 마을 앞 논이 모두 가습 주민들 땅
논농사 재배 면적 13만 5000평, 밭농사 6만평, 과수(사과) 농가 7가구 1만 5000평.
달산 2리는 점토질인 토질이 과일 재배에는 적합하지 않아 다른 삼승면 지역에 비해 과수 농가는 적은 편이나 예전에는 벼농사로 부농을 이루기도 했다.
30여 년 전 인근의 탄부면 마을과 천남리 앞 농경지 대부분이 이곳 주민들 소유였을 적에는 수도작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한때는 대추나무도 많이 심어 집을 지을 때 섣가래를 대추나무로 할 정도였다.
지금이야 특수작물을 하는 농가가 없어 마을이 경제적으로 부유하진 않다고 하지만 벼농사로 높은 농가 소득을 올려 잘 살았던 좋은 시절은 달산 2리 주민들에게도 있었다.
마을이 번성했을 때는 98호가 마을을 이룰 정도였다.
젊은이들도 많아 청년회 회원들이 발벗고 나서서 마을일을 하고, 그들의 활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돼 라디오 전파를 타고 방송이 되기도 했다.
염수환 이장이 그때는 청년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폐품을 팔아 모은 돈으로 기금 마련을 하고 마을 정비를 회원들이 손수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도로가 개설되기 전 마을 안까지 들어오던 버스를 주민들이 편히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던 버스정류장은 마을에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듯 보여도 주민들의 예전 생활상을 짐작해 볼 수 있어 가볍게 스쳐지나가 지지가 않았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선 발이 잠시 멈춘다.
진입로 양옆에 웬 기둥이 하나씩 서 있는데 궁금한 나머지 뭘까, 이것저것 떠올려 보기까지 했다.
기둥 위로 ‘지덕노체(智德勞體)’란 글씨를 써 아치형으로 만들어 놓았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궁금증이 해결될 수 있었다. 그것 또한 청년회에서 만들었던 것이라고 한다.
아치형은 사라지고 기둥만 남은 것이 안타까운 일인지, 기둥이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고 서 있는 것이 안타까운 일인지 판단하긴 어렵지만 남다른 생각으로 그런 것을 만들었던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무엇보다 값져 보였다.
마을을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버스 정류장이나 마을 입구의 기둥이 시대가 변해 필요성이 소멸된 것일지라도 다른 용도로라도 쓰여져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게 된다면 마을의 역사를 단편이나마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혼자만의 생각을 해봤다.
마을에는 몇 백년이 지났어도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하나 있다.
# 금적산 명기를 이어받은 명소 자랑
금적산의 명기를 이어받은 유명한 명소.
이곳이 바로 극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몇 백년간 주민들의 식수를 제공해 주는 큰샘이다.
묘 자리를 보는 사람들이 서원1리와 2리에 걸쳐 있는 금적산에서 명당을 발견하고 산 아래로 내려와 보면 그 자리가 가습 마을의 큰샘이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묘를 못 쓰고 돌아서야만 했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렇듯 큰샘은 달산 2리 주민들에게 최고의 자랑거리가 된다.
금적산의 물줄기가 큰샘으로 이어져 있어 보통 우물이 아니라고 말했다는 누군가의 말이 근거 없는 소린 아닌 듯 싶다.
중가습 사람들도 이 우물물을 길어다 먹었으며 가습 주민들에게 큰샘은 몇 백년 동안 삶을 함께 해온 각별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큰샘 물을 상수로 사용해 마을 주민들이 두레박 대신 수도를 통해 큰샘의 물을 쓰고 있다.
물 좋고, 금적산의 명기까지 이어받은 큰샘 옆에는 한 백년쯤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샘이 생기고 나중에 심어졌을 향나무는 오랜 생명력으로 그 자리를 지켜왔다.
아무리 가물어도 우물물이 마르지 않는 큰샘이 있는 곳은 달산2리의 명소이며 서울대 졸업생을 3명이나 배출한 것은 명소만큼이나 자랑거리가 된다. 이외에도 대학교수, 사무관 등이 여럿 있다고 한다.
달산 2리는 상수를 공급하는 수도관이 설치된 지 오래돼 교체가 요구되고 있다.
높은 지대는 수압이 낮아 물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압력모터를 설치해야 하는데 원선이 교체 돼야만 설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날씨가 추워 잠시 중단된 하수도 시설 공사가 다시 진행되면 배관 설치 도중 상수도 원선이 파괴될 우려도 있고 그럴 경우 주민들은 배관 교체를 바라지만 쉽게 처리될 것 같지가 않아 걱정이다.
원활한 상수 공급으로 주민들이 불편을 안 겪도록 하기 위해서는 담당기관의 책임 있는 행정처리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마을을 돌아보고 난 후 자랑비가 세워져 있는 또 다른 마을 입구로 발길을 돌렸다.
살구재라 불리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는 그곳은 옛날 주민들이 2∼3일간 일손을 놓고 풍물을 치며 놀고 먹고 풍년을 기원하는 백중놀이를 하던 곳이었고, 들녘에서 일하다 새참을 먹으며 쉬던 곳이기도 했다.
탄부 사람들이 원남장을 가기 위해 지나다니고, 청산에서 보은장을 보러 다니던 장꾼들이 왕래를 하던 곳 가습. 그곳은 인심이 좋아 길 가던 나그네들의 쉼터가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앉아 쉬던 살구재의 나무 그늘은 지나는 행인에게도 시원하고 편안한 나무 그늘이었을 것이다.
가습은 삼승면과 탄부면을 잇는 삼탄교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 교통이 편리해진 이후 차량 통행이 증가했다. 사고 방지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사고 위험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큰 교통사고가 발생하고 나서야 방지턱과 신호등이 설치되었다.
길 가던 나그네들의 쉼터가 되었던 가습. 우리는 잠시 걸음을 쉬어 가는 여유로움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가습 마을에서 바라본 넓은 들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김춘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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