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헌 선정훈 선생 송덕비 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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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헌 선정훈 선생 송덕비 제막
  • 송진선
  • 승인 2001.10.27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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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속 하개, 99칸 고가 앞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비와 침식일체를 제공하며 후학을 키웠던 남헌 선정훈 선생의 송덕비 제막식이 지난 25일 외속리면 하개리 선생의 고택 앞에서 개최됐다. 선생의 송덕비 제막식에는 선생의 후손들과 건립 추진위원, 군내 기관단체장 지역 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됐다.

추진위원장인 박재현 전 도교육위원회 의장은 식사를 통해 “선생이 살아계신 77년은 구한말의 난정 일제의 강점, 조국의 분단, 6·25동란 등으로 이어진 난세였으나 조국과 민족을 염원하시고 우리고장 보은을 위해 봉사하시다 가신 대의일관의 생애였다”며 “그 큰 은덕을 잊을 수 없고 후세에 길이 남겨 귀감으로 삼고자 송덕비를 세워 그 취지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는 취지를 설명했다.

다음은 송덕비문이 요지다.
선생의 위는 정훈(政薰)이요 자는 우현(友鉉)이며 호는 남헌(南軒)이다. 보성인으로 1888년 3월14일에 고흥 금산에서 태어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송사(松沙)선생에게 수학하여 경사(經史)의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때는 권문간신들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을미사변 등 일제의 강점기였기 때문에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뜻한 바 있어 중국에 가서 그곳 문물을 견문하였으나 얻을 것이 없음을 알고 오직 교육만이 구국의 길이라 결심하고 돌아와 민족회운(民族回運)의 대길지(大吉地)라는 이곳 보은으로 정하고 1907년 약관의 나이에 고택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가묘(家廟)를 짓고 서당인 관선정(觀善亭)을 세우면서 보은향교에서 대향회를 열어 존현양사(尊賢養士)의 뜻을 밝히고 명륜당을 서당삼아 훈학을 시작했다.

명망높은 스승을 초빙해 학비와 침식일체를 사재로 부담하자 원근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1927년에 관선정이 완공되자 교육의 장을 관선정으로 통합했다. 여기서 수학한 백여명은 광복된 새 조국의 학계와 문화계에서 활약하고 그들이 또한 후진을 길렀으니 1973년에 제자이며 문학박사가 된 임찬순이 글을 짓고 학우회가 세운 관선정비가 남아 그 때의 서당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대동상사를 설립해 전국 각지와 중국까지 지점을 두어 사업 이득금으로 서당운영의 기금으로 삼는 한편 학교와 면사무소의 부지 수천평을 공익을 위해 희사하고 퇴락한 향교중수도 자담했으며 효자 열녀 등 선행한 이를 찾아 후하게 포상하고 춘궁기와 흉년에는 어려운 사람의 식량도 도와주고 세금을 대납하는 등 사재를 털어 자선을 베풀었다.

1926년 순종의 국상때에는 거액을 헌금해 왕릉의 조성을 도았고 종친부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국치의 관직이라고 행사하지 않았다. 민족자존과 향토위한 일념으로 공명정대하게 살다가 간 선생의 큰 은덕을 새겨 뒷날 거울로 삼으려 한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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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교헌 2016-08-07 10:30:24
남헌선생 송덕비에 관한 자료를 잘 보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말로만 듣던 자료를 확인하게 되어 기쁩니다. 남헌 선생이 나라와 겨레에 끼치신 업적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2016.8.7 경기도성남시분당구탄천로95.424-902호 (이매동 아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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