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업소(6)- 양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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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업소(6)- 양우당
  • 송진선
  • 승인 2006.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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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 없는 지역의 대표적 명물
양우당 하면 청소년들 빼고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게 유명한 우리지역 대표적 명물 중의 하다.

지금 판매하는 것으로 보면 문구일부와 담배, 복권, 전구에서부터 전기담요 등 전기용품 까지 없는 게 뭐가 있을까 찾는 것이 쉬울 정도로 만물상, 잡화점이다. 잡화점이 우리지역의 명물로 손꼽히는 것을 보면 분명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다. 뭐가 있을까.

■ 시작은 양우당 서림으로 출발
양우당(대표 정구익)의 출발을 더듬어 보니 시작은 서점이란다.  상호는 보은서점이었고 보은에서는 서점 1호다.

60년대 정구익씨의 아버지가 삼산초등학교 입구에서 정구익씨의 큰 형님과 장사를 하다 보은서점은 작은 아버지에게 물려주고 그의 아버지는 남다리 인근 지금의 가구점 인근으로 이전해 그곳에서 양우당 서림이란 간판을 내걸고 서점 2호를 냈다.

그곳에서 7, 8년 영업을 하다 현재의 자리로 이전해 정착, 지금까지 양우당이란 간판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그 사이 보은서점은 간판을 내렸다.

정구익씨는 아버지가 가족들이 모두 보은으로 이사해 서점을 하고 있을 때 영동 용산 고향에서 혼자 농사를 짓고 있었다.

당시 농사지어도 남는 게 없었지만 고향의 땅을 자신에게 물려주고 황소 한 마리를 사주면 고향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65년 자신도 보은으로 들어왔다.

당시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가 물려줬던 보은서점을 팔고 나무장사를 하고 있었고 정구익씨는 그곳에서 3년간 종업원으로 있다 큰 형님이 분가해서 나간 후 아버지가 운영하는 양우당에서 온 가족들이 같이 생활을 했다.

자리는 지금의 자리다. 기와집이었던 당시의 가게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지만 그곳에서 아버지, 어머니, 둘째 형, 본인과 막내동생까지 온 가족이 생활을 했고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변변하게 신혼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방이 있고 형제들 따로 방을 쓸 정도로 넉넉하지도 않았고 겨우 서점 겸 문구점을 하면서 입에 풀칠하면서 생활할 정도로 대가족에다 가난했던 그곳에서 28살의 청년 정구익씨는 영동 학산 출신 25살의 처녀 전영순씨와 결혼(73년 12월)했다.

그전에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둘째 형도 분가해 나가고 막내동생도 74년 군대에 입대해 아버지가 운영하던 양우당을 물려받은 주인이 된 정구익씨는 늦게 만난 아내와 자신과 함께 산 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됐다.

그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를 돕는 종업원으로 형과 동생과 함께 하는 동업자였지만 상황이 달라졌던 것이다.

가업이라고 하면 가업이랄 수 있는 40년 역사의 양우당을 물려받은 주인으로 아버지가 했을 때보다 더욱 발전해야 한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때부터 시내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열고 가장 늦게까지 불을 밝히는 곳. 정구익 이름으로 다시 쓴 32년 역사의 양우당이 지금은 지역의 명물이 된 것이다.

■ 양우당의 3가지 특징
양우당의 첫 번째 특징은 잡화점이다. 없는 것이 없는 만물상이다.  전신은 분명 서점이지만 자연스럽게 문구를 겸업하다 자연스럽게 잡화점으로 자리를 굳혔다.

없는 게 없어서 물건을 사려고 읍내 구석구석 다니며 찾다가 없으면 양우당에 가면 살 수 있다.

이것은 기자가 내린 결론이 아니라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두 번째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365일 문을 여는 곳이다.  불과 5, 6년 전까지만 해도 단 하루도 문을 닫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양우당의 문은 항상 열려있다. 명절 때는 물론 집안의 대소사에도 그 곳의 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문을 열려고 해서 연 것이 아니고 어머니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셋째이지만 제사를 이곳에서 모셔서 형제들이 모두 양우당을 찾았다.

집은 협소하고 형제도 많고 딸린 자녀들까지 엄청난 식구들이었기 때문에 가게라도 열어놓아 아이들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해 문을 연 것이 수 십년이 된 것이다.

명절 때라고 해서 필요한 물건이 없는 것도 아니고 명절 때 가게가 모두 문을 닫을 것을 생각해서 미리 물건을 구입해도 미처 챙기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양우당만 오면 물건을 구입할 수가 있으니 주민에게는 이보다 더한 고마움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365일 문을 여는 곳이 됐다.

부인 전영순씨는 “내가 시집온 지 33년 됐는데 지금까지 문을 닫은 날이 열 손가락을 꽂을 정도”라며 “부모님 생신 때 외에는 거의 친정 출입도 하지 않았고 갈 때는 남편과 함께 가지도 못하고 혼자 얼른 갔다왔을 정도로 가게에 붙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문을 닫지 않는 집으로 인식된 양우당이 집안에 일이 있어 할 수 없이 가게문을 닫으면 사람들이 혹시 양우당에 무슨 일이 있나하고 인근 상점에 물어볼 정도였고 다음날이면 들러서라도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확인을 할 정도라고.

이렇게 인심을 잃지 않는 양우당의 세 번째 특징은 지역의 나침반과 같은 곳이다.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다.

아버지 대(代)부터 아들 대(代)까지 2대에 걸쳐 내려오는 양우당이 그곳에 터를 잡은 지 40년 가까이 되자 특별히 다방에서 만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양우당을 만나는 장소로 잡는다. 지금도 하루에 2, 30명이 물건을 사러오지 않아도 그냥 다녀가는데 옛날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여기에 그냥 ‘마실’을 오는 할머니들도 많아 가게 안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댔다.

특별한 것이 없는데도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구익씨가 내린 결론은 가게를 찾는 사람들에게 변변하게 대접은 하지 못해도 정말 인심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것.

73년부터 본격적으로 양우당을 운영한 정구익씨는 76년부터 반장 일을 보기 시작해 올해 3월까지 장장 30년 반장을 지냈다.

80년 물난리가 났을 때 저지대에 있는 남의 집 물건을 치우고 자신의 가게를 돌아보니까 쓸 것이 없을 정도로 물건은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자신의 가게를 돌아보지 못했다.

고향 친구와 형님 친구들이 수해를 입었다고 보내준 쌀이며, 라면도 주변에 수해를 입은 반원들에게 나눠줬다.

이런 것도 인심을 얻은 것이라면 얻은 것일 거라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 ‘왕소금’소리 들으며 저축
79년 기와집을 지금의 슬래브로 신축했다.

남이 쌀밥 먹을 때 이들은 맛없는 정부미 쌀을 먹었다. 언제 돈을 모으나 싶어서 악착같이 모았다. 잘사는 사람을 따라가겠다는 생각으로 절약을 했다.

그의 아내는 물건을 팔면 우선 정기적금부터 불입하고 나머지 돈으로 생활비를 썼을 정도로 지독하게 모았다.

그도 술도 모르고 장기도 모르고 바둑도 모르고 화투도 몰랐다.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남들에게 왕소금 소리를 들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일찌감치 중학교 때 대전으로 유학을 보낸 큰아들(고려대 졸)과 딸 둘(대전대, 경희대 졸)도 고등학교를 청주로 보낸 이들은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팔아 하숙시켜가며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마쳤다.

3남매를 모두 대학교를 보내도 농협에서 대출한 번 받지 않고 학비며 생활비, 가게 운영비를 모두 꿰어 나갔다. 그래도 한 달에 꼬박꼬박 적금을 불입했다.

지금은 물건을 주문하면 택배로 보내주지만 옛날에는 대전까지 가서 물건을 구입해 시외버스로 싣고 와야했고 정류장에서는 손수레로 물건을 실어올 정도로 택시 한 번 타지 않았다.

그러다 94년 구입한 물건을 실은 시외버스의 화물칸 문이 잘못 닫혀 물건이 모두 없어지는 사고를 당한 후 그의 부인은 이젠 고생을 덜해도 되겠다 싶어 운전을 배우고 95년 중형 승용차를 구입, 자가용 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부모의 절약생활을 보고자란 자녀들도 근검 절약 의식이 강한데 큰아들은 부모가 물건 하나 팔아 겨우 10원 떼기 100원 떼기 해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한다는 생각에 허투루 돈을 쓸 수가 없었다는 얘기를 털어놓을 정도.

지금은 그야말로 알짜배기 부자다. 양우당 건물뿐 아니라 부동산도 갖고 금융기관에 부채 한 푼 없다. 시장 옷 사다입히고 정부미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달콤한 과자 한 번 배불리 먹게 하지 않았어도 자녀들은 속 한번 썩히지 않고 잘 커 큰아들은 군수납품회사의 중견 간부이고 둘째는 교사, 셋째는 동화약품 비서실에 근무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교훈이 양우당 정구익·전영순씨 부부에 딱 들어맞는다.

그래도 벌만큼 벌어 이젠 좀 번 돈을 써도 좋겠지만 수 십 년 절약 생활이 몸에 밴 탓에 여전히 그들의 절약생활은 계속된다.

해외 고가의 명품구입에 혈안이 되고 과소비를 일삼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구익씨와 전영순씨가 던진 “개미처럼 일해야 된다.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규모있게 써야 돈을 모은다”는 한 마디에 저절로 귀가 쫑끗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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