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승면 서원2리(원서원)-금적산 아래 호목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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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승면 서원2리(원서원)-금적산 아래 호목한 마을
  • 보은신문
  • 승인 2006.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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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날씨가 많이 쌀쌀하다.

불어오는 찬바람에 대비해 옷을 챙겨 입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날씨가 추워진 건 분명한데 저건 그래도 좋단다.

고운 속살을 드러내놓고 처마 밑에 매달린 감들. 깎아 놓은 감은 가을 햇살에 적당히 잘 말라 맛있는 곶감이 될 것이다.

주렁주렁, 그 모습도 참 다정하다.

언제쯤이면 곶감이 될까. 마당을 나서다가 한번 쳐다보고, 집으로 들어서다가 또 한번 쳐다보고, 왠지 아쉬워 가까이 다가가 눈길 한번 더 주는 주인의 마음은 기다림이다.

서원2리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반송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아침나절 장에 간다고 나선 김씨 할머니, 몇 일 전 아들집에 다니러간다며 나름대로 멋을 내고 나섰던 서원댁, 학교 가는 길에 쫑알거리며 지나쳤던 아이들, 그들 모두는 오고가는 길이 염려되는 반송의 가족이다.

소나무는 그렇게 몇 백년 동안 주민들의 안녕을 바라며 서 있었다.

나무는 주민들 뿐 아니라 마을에서 이어지는 금적산 등산로를 밟는 등반객들의 무사귀가도 기원해줄 것이다.

원남(삼승면) 사거리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보은 방면으로 2㎞ 지점에 위치한 서원2리. 보은 방향에서는 서원1리와 탄금1,2리를 지나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어귀에 오래된 소나무가 있어 소나무가 있는 마을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예전에는 주민들이 주로 원남 시장을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생활권이 원남과 더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교통이 좋아지면서 보은으로 많이 다닌다고 했다.

서원2리는 사과 재배 농가가 5가구로 삼승면의 다른 마을보다 많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은 올 가을 길옆의 과수원에서 탐스럽게 달린 사과를 실컷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을 안에 있는 넓은 소류지는 금적산과 더불어 좋은 경치를 자아낸다.

마을 봉사자로는 조진환(55) 이장과 권태헌(76) 노인회장, 김섭(41) 새마을 지도자, 박창숙(47) 부녀회장이 있다.


# 서원이 있었던 곳
서원리(西原里)는 1975년 행정리 개편에 의해 서원1,2리로 분리되었다.
원서원으로 불리는 서원2리는 삼승면 서쪽 금적산 중심의 완사면(緩斜面)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과거 서원이 있었다하여 書院里라 하였다는 기록과 서쪽의 언저리라는 뜻에서 생긴 지명 西元里라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마을은 西原里로 불리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의 동생인 송시도 선생이 일경당이란 서숙(서원)을 건립하여 유생에게 강학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고 보은군 지명지에 기록되어 있다.
송시도(1613-1689) 선생의 자는 성보, 호는 새한재, 본관은 은진으로 어려서 형인 송시열과 함께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 교관에 올랐다가 헌종 때에는 일시 익산 군수를 지낸 바도 있다. 만년에는 금적산 아래에 내려가 후진을 양성하였고 수자학에 밝아 소우암(小尤庵)이라 불리었다. 송시도 선생 당시에는 산암사 및 일경당 서숙이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지금 삼승면 선곡리에 위치하고 있는 금화서원은 본래 서원리 금적산 기슭에 조선 순조 15년(1815년)에 창간되었으며 고종 8년(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던 것을 1917년 보은 유림회가 선곡리로 옮겨 재건한 것이라고 기록된 자료를 찾아볼 수 있었다.

# 금적산 아래 온화한 마을
원서원은 금적산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 펼쳐져 있어 온화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경상도 복주, 지금의 안동으로 피난 후 입궐하던 중 지금의 마로면 오천리로 은거차 왕래재를 넘어 관기리에 머물던 중 금적산을 가리켜 서편에 뜬 반달과 같다고 하며 삼태기 같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 길지(吉地) 중의 명당이라 찬탄하였다고 한다.
원래 원서원의 마을 자리는 지금보다 더 위쪽인 금적산 바로 아래로 집터로 보이는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말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조진환 이장이 어렸을 때인 6,70년대는 금적산이 벌거숭이산이라 토끼가 어디로 뛰어가는지 멀리서도 그 모습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땔감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난방 시설 등의 발달로 점차 땔감 사용이 줄어들자 자연히 산에 나무가 많아지고 커지면서 울창한 산새를 이루게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금적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나무가 너무 커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예전처럼 멀리까지 보이진 않는다고 한다. 금적산을 오르는 등반객들에게 그 점이 한 가지 아쉬운 부분으로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상때부터 지금까지 금적산 아래서 터를 잡고 살아온 주민들.
그곳에 화목한 마을 서원2리가 있다.
40호 90여 명의 주민 중 3대가 모여 사는 집이 7가구나 되며 예나 지금이나 크게 의 상하는 일 없이 주민들이 여전히 정답게 살아간다고 한다.
특히 사람들의 성품이 점잖아 마을 분위기도 화목하다는 서원2리.
맹모삼천지교란 말이 떠올랐다.
맹자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데 그만큼 사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듣고 배우면 그렇게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원서원 주민들이 보고 듣고 배우며 산 것은 무엇일까.
서원2리는 부농을 일구진 못했어도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화목한 마을을 이루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마을에서는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 서원 소류지로 농사 편의
서원2리는 사과재배 농가가 5가구로 다른 삼승면 지역에 비해 상당히 적은 수였다. 그래도 농가당 7천평에서 1만평 정도 사과 재배를 하고 있다고 한다.
논을 과수원 등 밭으로 만들어 예전보다는 논이 많이 줄긴 했지만 주민들 대부분 벼와 잡곡 위주의 농사로 생활한다.
이 중 8가구가 계약 재배로 장아리씨를 수확해 판매하는 것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봄에 무씨를 뿌린 뒤 꽃이 떨어지면 종자를 받고 후작으로 콩을 심는다고 했다.
마을에는 1965년 축조된 제법 큰 소류지가 금적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주민들은 큰 어려움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소류지가 있어 물을 항상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뭄 피해도 적어 주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곳이다.
소류지에는 건수가 빠져나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공간이 있는데 장마 때면 물이 많이 넘쳐 산이 패이거나 농경지가 유실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건수가 흘러나가는 곳에 옹벽을 쳐서 이런 문제점을 보완할 필요성이 절실해 보였다.
이것은 주민들이 바라는 숙원 사업이기도 하다.

집 안마당에 꽃을 심고, 색 바랜 대문에 페인트칠을 하는 마음은 누구나 다 같을 것이다.
내 집이 깨끗하고 예뻤으면 하는 것.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마당을 청소하다가 대문 앞까지 쓸고 하다보니 어느새 골목길이 깨끗해졌다. 누구나 이런 일의 주인공이 되어 뿌듯함을 맛보고 싶어 하지만 선뜻 나서지는 못하는 듯하다.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 준다면 나에게도 친절한 이웃이 생길까. 아니면 남이 먼저 친절한 이웃이 되어 준다면 나는 좋은 이웃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화목한 서원2리 주민들의 따뜻한 인심이 그냥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다.
원서원 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송무고금색(松無古今色: 소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그 빛깔이 변함 없다)의 반송은 긴 세월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으며 애환과 사랑을 담아 주민들과 오래도록 함께 할 것이다.
항상 늘 푸른 소나무로 그 모습을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김춘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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