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택 현 국회부의장 비설실장(1급 관리관, 보은 강신 출신)
국회부의장 비서실장은 당에서 추천한 사람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이번 이용희 의원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된 후 열린우리당에서는 관례대로 비서실장을 추천했다.하지만 이용희 부의장은 배짱을 부렸다. 부의장을 안하면 안했지 당에서 추천한 비서실장은 받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고집을 꺾지 않은 이용희 부의장은 결국 40년간 정치적으로 동고동락해온 그의 오른팔 김택현 보좌관을 부의장실의 비서실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보은 강신 안향마을 출신인 김택현(만60세)씨가 6월19일자로 행정자치위원장의 4급 보좌관에서 1급 관리관으로 승진하게 된 것이다.
신의를 빼면 설명할 수 없는 정치인 이용희 사단이 또 한 번 주목을 받고 화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현재 국회부의장실 비서실에는 실장인 김택현 관리관 외에 3급 1명, 4급 2명, 9급 3명 총 7명이 근무한다.
# 정치 초년병과의 만남
정치인 이용희는 정계 거물이라는 수식어 외에 한 번 신의로 맺어진 인연과는 끝까지 가는 사나이이고 또 ‘이용희’와 인연을 맺은 사람 또한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이용희 맨’이 되는 블랙홀 현상이 그들에게서 일어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이런 현상은 나타났다. 어쨌든 정계에서는 기이함으로까지 표현된다.
‘이용희’가 현직의원이어서 힘이 있든 아니면 낙선해 야인이었든 관계없이 그들 서로는 신의로 똘똘 뭉쳐있다.
배신이 무죄인 정치판에서 출마자들 조차 자기 유리한데로 이당 저당 부나방처럼 떠도는 마당에 일반 민간인이야 더 할말이 없을텐데 ‘이용희와 이용희 맨’들은 한 번 인연을 영원으로 간직하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그 이상한 사람 들 중에 바로 김택현 국회 부의장 비서실장도 포함된다.
정치인 이용희와의 인연은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곡초등학교(16회)와 보은중학교(9회)를 졸업한 그는 청주공고 3학년 재학 중 4·19 혁명에 가담해 데모를 하다 청주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졌다.
당시 의원 뱃지를 달지 않은 이용희부의장이 신민당 지구당 위원장들과 합동으로 면회를 왔는데 그곳에서 처음 김택현 실장과 조우했지만 단순만 만남이었다.
다행히 유치장에서 나왔고 고교 졸업 후 태권도 공인 5단인 실력을 살려 보은읍, 외속리면, 산외면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며 생활한 그는 4·19 혁명에 가담한 전력으로 보은 경찰서 요주의 대상이 돼 정치사찰 아닌 사찰을 받아 19살에 이용희 부의장이 몸담은 신민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보은에서 이용희 부의장 보좌관 역할을 하면서 경찰의 미행 감시는 심화됐고 심지어 선거 때에는 활동을 아예 못하게 붙잡아가기도 했다.
# 정치인 아닌 정치인으로 겪은 산고의 시절
현재 만 60세인 그의 인생에서 이용희를 빼면 얘기가 안된다. 딸 하나 없이 간신히 아들 하나 얻었는데 남들처럼 평범하게 생활하지 않고 험한 정치판에 뛰어들어 경찰에 끌려다니는 자식을 본 부모님에게 이용희는 결코 달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보은읍 중앙시장에서 한약방을 하던 아버지(고 김해동)는 말을 듣지 않는 애물단지 아들이 ‘이용희’에게서 손을 떼게 친인척까지 동원해 말렸지만 허사였다. 정치사찰이 되면 될수록 그에게는 오히려 오기가 생겼고 끝까지 이용희와 함께 간다는 동지애가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1960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됐다가 5·17 쿠테타로 의회가 해산된 후 본격적으로 야당생활을 시작한 이 부의장이 6대, 7대, 8대 국회의원에 도전해 내리 낙선만 했던 당시의 상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위세가 등등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처남 육인수로 선거 때 참관인조차 구하지 못할 때였다.
감히 대통령의 처남에게 도전한 정치인 보좌관을 아들로 둔 죄(?)로 그의 부모님도 사찰 대상으로 경찰서는 물론 청주 검찰까지 불려 다니던 때였다.
그러자 하나 겨우 있는 자식 잘못될까 노심초사했던 부모님은 후사라도 일찍 얻고 또 그러면 아들이 마음을 잡을까 싶어 이웃마을 감딩이(현재의 보은읍 신함2리) 처자(박하임씨, 58)를 며느리로 삼았다.
여형제는 있지만 독남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재산이 있으면서도 전혀 어렵게 생활하는 그의 뒤를 봐주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정치인생의 종지부를 찍지 않았고 서울에서 돈이 없어 단칸방에 봉투 쌀을 사 먹고, 끼니를 거를 때가 있어도 그는 이용희의 오른팔 역할을 놓지않았다.
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용희 의원이 무소속으로 당선되고 그의 보좌관으로 정식 이름이 국회에 등록돼서야 흑석동에 당시 500만원짜리 단독주택과 청계천변 황학동에 30평 정도의 점포도 마련해 줬다.
보좌관을 하다 다음 선거에서 이의원이 낙선돼 보좌관 자리도 떨어지면 고향으로 내려올 생각말고 점포 세나 받아먹고 서울에서 아예 눌러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신 군부가 정권을 잡았던 11대 때 이용희 의원은 국기문란 혐의로, 죄도 없는 그는 보좌관이라는 명목으로 정치폭력배로 몰아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그와의 인연으로 야당 면책을 했던 남성우씨는 험한 꼴을 당해 큰 고초를 겪는 등 야당 정치인의 보좌관인 그는 물론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그 때 고초를 겪을 만큼 겪었다.
지역 경찰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고 경찰 친구들도 아는 척을 안했고 사촌 등 동기간은 물론 처갓집 처남, 동서들과의 관계까지 유린당했다. 주변에 도움을 줄만한 사람들을 감시하고 미행하는 등 사찰이 이어지자 어쩔 수 없이 김택현과 관계를 끊게 만들어 버렸다.
쫓기는 신세인 그를 한 달 이상 6촌 처남 박하성씨와 동네 친구였던 김홍준씨가 각각 자기 집에서 은신토록 하게 했지만 결국 경찰서 행을 비켜갈 수 없었다.
# 어렵다고 신의 버리지 못해
40년 동안 그의 그림자 생활을 하면서 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을 하지 못했겠는가. 하지만 이의원과의 신의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직업으로써 보좌관을 했다면 12대부터 16대까지 그리고 충북도지사 선거까지 내리 5번의 선거에서 낙선했던 그를 되돌아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 계보와 당 한 번 바꾸지 않았고 김택현 비서실장이나 노덕산 운전기사 겸 보좌관을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이 부의장의 소신에 그도 젖어 당장 직업이 없어져도, 그래서 돈벌이가 없어도 이 부의장을 떠나지 않았다.
더욱이 인간적인 이용희 처신을 배신할 수도 없었다. (주) 진로의 고문으로 갈 때는 홍보팀장으로 그 일을 그만뒀을 때는 모 유통사업단 팀장으로, 또 17대 총선 직전에는 이 부의장 아들 회사에 자리를 마련해주었고 그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 총재시설 운영했던 내외문제 연구소에서 일하게 하는 등 정치적 소신 못지 않게 변함없이 사람을 챙겨주는 의리를 등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한 번 믿으면 끝가지 믿는다는 것이다. 일단 돈을 맡기면 뭐에 얼마를 썼나 보고 한 번 받지 않고 얼마가 부족한가만 묻고 주변에서 보좌관들에 대한 험담을 들으면 험담한 당사자에게 “그게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는데 내가 잘못 처신했구먼” 하는 식으로 보좌관들을 감싸안는다는 것.
부의장 부인에게 절대로 사모님 소리를 못하게 하고 아줌마라고 부르게 할 정도로 가족같이 격의 없다는 것도 그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모든 것이 40여년간 이용희의 그림자가 되어 선거가 있으면 회사에 한달 이상 휴가를 내고 또 병가까지 내 지역에서 조직을 재건하고 선거지원을 했던 것이다.
# 국회부의장 비서실장이 마지막
40년 정치인생 중 38년간 야당 국회의원 보좌관만 하다 2004년부터 여당에 몸담은 김 비서실장은 야당 생활과 여당 생활을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그가 모시는 국회의원이 17대에 들어와서 행정자치위원장에다가 이번에는 부의장까지 올랐으니 이용희 부의장 못지 않게 그도 40년 보좌관 인생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국회 보좌관들 모임인 국보회 회장인 그는 시간나면 회원들과 산행을 하고 또 재경 보은중학교 동창회원들과 종곡초등학교 동창들과도 만나 못 마시는 술이지만 가끔 술잔도 기울인다.
감시당하고 미행 당하고 고문당했던 시절에도 지조있고 신의를 지킨 인간 김택현으로 인해 덩달아 고생했던 외속 장재리 남성우씨 등 친구들과 만나면 그때를 회고하며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 또 취업에 도움을 준 중학교 후배인 김모씨가 지금 대성한 것을 보면 스스로 기쁘기도 하다.
몸 고생 마음고생만 시킨 아버지가 70년대 서울에 마련해준 흑석동 500만원짜리 주택과 650만원 정도에 구입한 청계천 상가에서 나오는 임대료만으로도 먹고 사는데 대한 어려움이 없다.
고등학교 졸업 후 중앙대 경영대학원, 건국대 축산대학원을 수료한 김 비서실장 스스로도 이젠 욕심도 없고 애로사항도 없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젊은 시절 남들 안하는 고생을 사서해 하루도 맘 편히 지내지 못한 부인 박하임씨와 김택현 비서실장 그리고 2남 3녀의 자녀들은 행복한 가족사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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