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평원으로 보은-내북간 4차선 도로가 시원스레 뚫려있다. 넓은 대평원과 쭉 뻗어있는 4차선도로가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학 학(鶴) 수풀 림(林)을 쓰고 있는 학림리를 지명지에서 보면 산내면(山內面)의 지역으로서 함림산성(含林山城) 밑이 되므로 함림이라 했었다고 한다.
함림산성은 대바위 가든 뒷산에 있었던 돌성으로 지금도 산 정상부에서 돌무더기를 볼 수 있다.
그런데 1914년 일제 식민지하에서 함림이 내함리, 외함리, 율지리와 산외면의 대암리(대바위)를 병합해 학림리라 해서 읍내면 (보은읍)에 편입시켰다는 것.
일부 주민들은 일제시대 때에 나무가 말라 죽을 정도로 학이 많이 서식해 학림(鶴林)이라 이름지었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학림리와 이웃하고 있는 신함리의 어원이 함림산성과 관계가 있고 또 학림리도 옛날에는 학림이 아닌 함림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아 함림리가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학림리는 학림 1·2리로 나눠졌지만 굳이 1, 2리로 분구하기가 어려울 만큼 마을의 어원이나 생활상을 같이 하고 있다.
현재 학림1리는 부부지간인 신안수(60) 이장, 한윤숙(54) 부녀회장이 마을의 봉사자로 활동하고 학림2리는 올해부터 이장을 맡은 서상기(63)이장, 김승환(75) 노인회장, 김재복(53) 새마을지도자, 권병림(56) 부녀회장이 마을 발전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 7개 자연마을로 이뤄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본래 학림리는 내함리, 외함리, 율지리(지금의 밤개울)와 산외면의 대암리를 포함한 4개 마을로 돼 있었던 것이 지금은 7개의 자연마을로 이뤄졌다.
1리는 대바위 가든과 가스충전소가 있는 새동네(18가구), 교회가 있는 새 집말(7호), 애견사 옆 하천 건너편에 있는 새 말(16호)까지 3개마을 41가구 약 8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2리는 마을 보호수가 있는 마을인 밤개울(12가구)과 4차선 도로 바로 아래 있는 고무실(19가구), 과거 역원이 있었던 곳으로 2구 마을회관이 있는 마을인 평지말(26가구), 보은조경이 있는 마을인 신작로말(8가구)로 형성돼 있으며 68가구에 주민수는 130여명에 이른다.
학림리는 국도 19호선의 확포장에 의해 마을이 집단 이주하는 등 마을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 의해 건설된 신작로를 1960년과 1974년 국도 확장으로 마을이 집단 이주하거나 일부 주택이 철거되는 등 마을이 크게 재편되었고 이주하면서 새로 마을이 형성된 것.
아랫대바위와 윗대바위도 국도 확장으로 모두 철거되고 현재 대바위 가든 쪽에 마을이 집단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는데 주민들이 새로 마을이 형성됐다 해서 새동네라 부르고 있다.
그런가하면 신작로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돼 있는 신작로 마을도 국도 확장으로 일부 주택이 철거돼 6호 정도만 거주했으나 최근 가구가 늘어났다.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으며 보은읍의 관문인 학림리는 지금도 국도변에 위치해 교통이 편리하지만 옛날에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 역원이 있었던 교통 요충지
조선시대 학림리에는 함림 역이라 불리던 역이 있었는데 대마 2필, 기마 3필, 복마 5필을 두었고 역리 30명과 종 40명이 머물렀었던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함림역은 경상도 지방의 농산물이나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는 중간 기차역으로 우리나라 교통의 허리를 담당했다.
또 우리 지역이 배출한 인물인 김 정 선생이 순창군수 재임시 이웃 담양부사 박상과 함께 중종의 왕후 신씨 복위를 상소해 이곳 함림 역에 유배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역원의 위치는 정확하게 어느 곳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70대 연령층의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학림2리 마을회관·경로당 자리가 옛날 역원자리라고 옛날 어른들이 하신 말씀을 들었다고 전했다.
마을회관 입구 양쪽에는 글자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두개의 비석이 있다. 주민들에게 무슨 비석이냐고 질문을 던져봤지만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주민들은 아마도 누구의 공적비 같다는 말을 했다.
역원 주변에는 마방이 있어서 말밥도 주고 말도 쉬게 하면서 이곳의 말을 갈아타고 한양길에 올랐다고 한다. 또 주변에는 요기도 하고 하루를 묵었다가 갈 수 있는 주막거리가 형성됐었다고 한다.
보은과 지척에 있었지만 학림은 교통 요충지로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경제활동이 왕성했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 용화와 같은 물줄기 온천이 있다
학림리는 지금도 시야가 트인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하루 종일 햇살을 받는 지역이지만 여러 지명에서도 따뜻한 기운이 솟는 곳이라는 것을 찾을 수 있다.
한때 대바위에서 온천이 나온다고 해서 지역이 크게 술렁거렸던 적이 있다. 지명에서도 온천샘이라고 불린 샘이 있는데 광대바우에 있는 샘으로 200년 전까지만 해도 온천수가 피부병에 특효라는 소문을 듣고 나병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겉보기에 흉한 모습을 한 나병환자들이 자꾸 마을로 몰려들자 당시 마을 주민들이 더 이상 나병환자들이 마을로 들어오지 않게 아예 샘을 메웠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온천 샘을 볼 수가 없지만 주민들은 온천샘 물줄기는 경북 용화온천과 같은 물줄기로 유황냄새가 난다고 했다. 대바위 가든 측에서 90년대 초 이곳에 온천공 4공을 팠다가 메웠다는 얘기도 전했다.
지금도 개발은 안됐지만 굴착해 놓은 온천공을 통해 흘러나오는 용화온천 물을 떠다가 씻는 사람들이 많고 피부병에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 정평이어서 대바위 온천 샘과 용화온천이 실제 같은 물줄기가 맞고 그래서 개발만 된다면 상당한 경제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온천목욕을 위해 일부러 온천을 찾아다닐 정도로 목욕이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이곳에 온천이 개발된다면 보은의 경제적 부흥은 대단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새 말 뒤에 있는 산은 따뜻해 주변에서 가장 먼저 나뭇잎이 피고 눈이 와도 이곳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학림은 온천샘, 화산 등 지하에 따뜻한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는 지역이다.
# 경지정리 되며 부촌
넓은 경지면적을 자랑하고 있는 학림리도 옛날에는 어느 농촌이나 마찬가지로 보리고개를 겨우 넘기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그러다 상궁저수지를 막고 1975년 경지정리가 되고 농업용수로를 만들면서 학림들은 곡창지대가 됐다.
경지정리 전에는 대부분 밭이고 일부 천수답에서 벼농사를 지었지만 물이 부족해 농사를 짓기가 어려웠다.
특별한 경제작물이 없었던 때 목화, 밀, 보리, 콩을 심었고 뽕밭을 조성했었으며 거름이 좋아야 농사가 잘되기 때문에 거름이 부족했던 당시 주민들은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도 소변을 집에 와서 봤을 정도이고 읍내 장에 갔다가 용변볼 일이 급해도 참았다가 집에까지 와서 용변을 볼 정도였다고 한다.
땅을 비옥하게 할 거름을 만드는데 그만큼 어려움을 겪었던 당시 조상들의 지혜와 애절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설명들이다. 6, 70년대를 회고하던 할머니들은 비료가 흔한 지금은 호강한다고 말했다.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친 학림 들은 이후 90년대 대구획 경지정리를 실시해 그야말로 대평원을 보여주고 있다.
보리고개도 없어지고 생활이 윤택해졌으며 보은읍내와 가깝고 또 도로변에 위치해 있어 땅값도 높게 형성되는 등 모든 것이 풍족해졌다.
# 대바위 옛날 소풍장소로 유명
원래는 산외면 지역이었던 대바위는 그야말로 큰 바위들이 많은 곳이었다. 도로확장으로 대부분 없어졌다. 이중 의사 대바위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과거에는 암행어사들이 암행을 가다 쉬던 곳으로 바위 가운데에 큰 소나무가 있어 동네 주민들이 그네도 매달아 뛰고 놀았던 곳이었다고 한다.
2, 30명이 한꺼번에 앉아도 될 만큼 바위도 넓고 또 주변 풍경도 좋아 한 때 학생들의 소풍장소로도 각광을 받았다.
그러다 도로 확포장시 폭파되어 지금은 대바위 가든 앞에 일부만 남아 있다. 지금도 소나무와 어우러지고 앞에는 보청천이 흐르는 등 풍경은 수려하다. 지금은 없어진 옛날 대바위 가든 옆 절터에 있는 바위에는 주민 일부가 매년 나쁜 병에 걸리지 말고 무병장수하라고 빌었다고 한다. 지금도 음력 정월초사흗날이면 이곳에서 정성을 드린다.
바위에 얽힌 전설은 이 뿐만이 아니다. 새동네 뒷산인 문암산에는 지금도 두드리면 북소리가 난다는 북바위가 있다. 사방이 1m쯤 되는 네모 모양의 바위 중간에 구멍이 뚫려 있다.
전설에 의하면 삼국시대 백제군 소속 양서장군이 신라군과의 싸움에 패해 문암산으로 피신, 울분을 삼키느라 문암산에 있는 바위를 구멍이 생길 정도로 10여차례나 칼로 내리쳤는데 그때 그 구멍에서 북소리가 들렸고 이 북소리는 바로 진군가 처럼 들려 양서장군이 이끄는 군사들의 사기를 심어주었고 결국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승리, 보은읍 산성리에 있는 노고성을 탈환했다고 한다.
어쨌든 치열한 전쟁에서 승리의 요인으로 작용한 바위가 학림리에 있으니 학림리는 수입농산물과의 전쟁 등 앞으로 모든 경쟁에서 주민들이 이길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바위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대바위 가든 앞에는 학림공원이 조성됐고 2003년 학림1리는 하천변에, 학림2리는 마을 진입로변에 식재한 매실나무도 이다음에 마을의 큰 경쟁력을 가진 자산이 될 것이다.
갖가지 음식을 마련해 주민 모두 참여한 마을잔치를 개최하고 노인들에게 효도관광을 실시해 청소년들에게 경로효친 사상을 고취시키는 학림리.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대평원만큼이나 인자하고 푸근한 인심을 나누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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