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대 院長(원장)을 지낸 조선 文臣(문신) 우의정에 오른 知守齋(지수재) 兪拓基(유척기)
상태바
11대 院長(원장)을 지낸 조선 文臣(문신) 우의정에 오른 知守齋(지수재) 兪拓基(유척기)
  • 보은신문
  • 승인 2006.03.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기형 /외속봉비/전군의원/유도회 보은군지부지부장/상현서원원장
考證學(고증학)의 전래
宋(송).明(명)시대의 성리학이 空理空論(공리공론)과 독단 해석에 치우쳐 儒學(유학)본래의 사명을 이탈하였으므로 2반등으로 經史(경사)등을 엄밀 정확한 고증에 의하여 연구하려던 학문.

이조에도 17,18세기 이후 청나라 때의 고증학에 영향을 받아 실학사상의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청대의 고증학은 송,명의 경서 해석을 고증키 위해 尙古(상고)로 소급하여 실증하는 훈고학적인 의미가 있으며 그 대상은 經學(경학), 史學(사학), 地理學(지리학), 金石學(금석학), 天文學(천문학)등이며 명말 청초의 학자 고염무를 비롯하여 청나라초의 염약기에 이르러 대성케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燕行使(연행사)의 왕래로 소개되었고 柳行遠(유행원), 李翼(이익)에 의하여 실학으로 발전하였다.

영조, 정조때 역사 지리 금석학 등의 고증적 연구는 丁若鏞(정약용)을 위시한 안정복, 신경준, 유득공, 한치운, 김정희, 박세당 등의 실학자를 배출하여 일대 문에 부흥을 일으켰으므로 실학파를 고증학파라고도 한다.

生涯(생애)와 저서
1691년(숙종17년)에 출생하고 1767년(영조43년)에 돌아간 문신 호는 知守齋(지수재) 본관은 杞溪(기계) 서울 출신 유명악의 아들 1714년 과거에 급제 검열 정언등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1721년 冊封奏請使(책봉주청사)의 書狀官(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신임사화로 인하여 홍원에 유배되고 동래에 안치되었다. 1725년 노론의 재 집권으로 재등용되어 대사간 동부승지를 거쳐 승지겸 참찬관을 겸하였다. 1739년 우의정에 올라 김창집 이이명의 복관을 건의하여 신원시키기도 하였으나 소론 유봉휘등을 탄핵하다가 실패하여 삭직 되었다가 1760년 다시 등용되어 영증추부사가 되고 봉초하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는 노론계결의 문신으로 천보와 같이 영조의 蕩平(탕평)政治(정치)에 참여 하였다. 특히 倉穀(창곡)租稅(조세)등의 경제 정책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예학에도 밝았다.
시호는 文翼(문) 저서에 知守齋(지수재) 집이 있다.

連載(연재)를 마치면서
역사는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乙酉(을유)년이 엊그제 같은 데 벌써 甲戌(갑술)년도 2달이 가고 3월이 시작됐다.

바쁘게 살아가는 속에서도 한번쯤 과거를 통해 오늘을 조명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여 4회에 걸쳐 서원이 걸어온 발자취를 소개하고 나니 어쩐지 몇 백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뒤돌아보면 과거 우리 조상들은 농경시대를 살아가면서 춥고 굶주림은 겪었으나 정신적으론 풍요로움에 만끽하면서 살아왔는데 오늘의 현실은 물질 만능의 풍조와 외래 문화의 유입으로 인륜과 도덕이 상실되고 폐륜 망덕이 만연하여 최대 최악의 범죄가 우리의 귀와 눈을 더럽히고 마침내 가정이 흔들리고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다.

무너진 사회윤리를 다시 세우고 험악한 세상인심을 바로 잡으며 건전한 상식과 정의와 예의를 바로 세우는 도덕운동이 절실히 요청되는 오늘의 시점에서 이미 과거 선현들이 그런 역할을 수행에 왔던 교육의 현장 유림의 본거지로서 서원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 필자 혼자만의 소망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여러분 애독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