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대 원장을 지낸 性理學者(성리학자) 대제학에 오른 陶庵(도암) 李縡(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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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원장을 지낸 性理學者(성리학자) 대제학에 오른 陶庵(도암) 李縡(이재)
  • 보은신문
  • 승인 2006.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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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洛論爭(호락논쟁)의 起源(기원)
숙종 초에 懷尼(회니)의 다툼을 계기로 서인계통의 학자들이 老論(노론)과 少論(소론)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동왕 말년에 이르러 노론 학자들 사이에 학설의 차로 인하여 쟁론이 일어나 학계가 다시 二派(이파)로 나뉘었다. 이 중에 하나를 湖論(호론) 혹은 湖學(호학)이라 하고 다른 하나를 洛論(락론) 또는 洛學(락학)이라고 하였다. 이 쟁론은 애초부터 정쟁이나 당쟁의 유는 아니었으나 是非(시비)의 전개가 거의 당론화되어 2백여년이 지나도록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조선 유학사상 가장 주의할 만한 논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하겠다.

호락논쟁은 遂菴(수암) 權尙夏(권상하)의 문하에서 발단하여 洛下(락하)의 학자들에게 파급되었다. 당시 수암은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로서 청풍의 황강에서 강학하여 그 문인이 매우 많았다. 문인 중에 가장 걸출한 이는 南塘(남당) 한원지와 외암 이간이었다. 수암의 문인들 사이에 禽獸五常(금수오상)의 문제와 未發氣質(미발기질)의 문제 등을 주제로 토론이 전개되어 시비가 쉽게 가려지지 아니하였다. 그중에도 남당과 외암의 견해는 더욱 차이가 있어 논쟁이 심각하였다. 결국 두 사람은 수암에게 질정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수암은 남당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논쟁은 더욱 확대되어 湖中江門(호중강문)만의 논제로 그치지 않고 洛下(락하)의 학자들도 논쟁에 가담하여 드디어 호락간의 시비가 되었다.

이른바 호론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수암과 남당 학설을 지지했던 이들이 충청도에 살았기 때문이고 외암도 물론 충청도에 살았으나 그의 학설을 추종하고 호론을 반대한 이들이 대부분 경기도에 살았으므로 락론이라 불린 것이다.

論爭(논쟁)의 주제
이 논쟁의 조목은 매우 복잡하다. 그 가운데 요점이 되는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人性(인성)과 物性(물성)의 동이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래부터 心體(심체)가 선한가 하니면 선과 악을 겸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관한 논란이다.

도암은 사람과 동물의 성품이 동일하다는 이간의 학설을 주장하고 사람과 동물의 성품이 동일하다는 이간의 학설을 주장하고 사람과 동물의 성품이 각각 다르다는 남당의 학설을 반박하였다.

生涯(생애)와 저서
도암 이제는 숙종6년(1680)에 나서 영종22년(1746)에 돌아갔다. 자는 熙卿(희경) 도암 외에 寒泉(한천)이라는 호도 썼다. 소시에 숙부인 귀락당 이순성에게서 수학하였고 詩(시)로써 유명하였다. 문과를 거쳐 벼슬은 대제학 우참찬에 이르렀고 文正(문정)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일찍 등과한 것을 자신의 불행으로 여겨 중년 이후에는 성리학과 예학을 힘써 연구하였다. 경종초 辛壬士禍(신임사화)에 귀락당이 화를 당하자 출사할 뜻이 더욱 없어져 노년에 이르도록 독서에 잠심하였다.

그의 학문은 뚜렷한 師承(사승)은 없고 정암과 율곡을 私淑(사숙)한 바가 많았다. 그는 늘 정암과 율곡은 나의 스승이다. 또 나는 율곡께 무한의 은혜를 입었다라고 말할 정도이었다. 心性論(심성론)에 있어서 이간의 設(설)을 지지하여 한원진 등의 호론을 반박, 당시 락론의 대표적 학자로 일컬어졌다.

저술로는 문집 50권외에 사례 편람, 사서 강설 등이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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