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대 院長(원장)을 지낸 性理學者(성리학자) 우의정에 오른 遂庵(수암) 權常夏(권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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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院長(원장)을 지낸 性理學者(성리학자) 우의정에 오른 遂庵(수암) 權常夏(권상하)
  • 보은신문
  • 승인 2006.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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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은 일명 理氣(이기)학으로 우주 森羅萬象(삼라만상) 모든 현상에 대한 고도의 철학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학문이다.

이조 500년 간 대표적 학문으로 퇴계 율곡을 비롯하여 여러 선생님들의 논문이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번 호와 다음 호에 개재하는 4분 선생은 이조 후기 대표적인 학자로 학문적 정치적으로 우리 보은에 많은 영향을 남긴 분들이다. 방대한 논변을 지상에 개재하기 어려움으로 이분들의 생애와 저서만 간략히 기록하니 이해하여 주기 바랍니다.

性理學(성리학)의 전성기.
우리나라 성리학은 明宗(명종) 宣祖(선조) 시대에 학자들이 많이 출현하여 理氣心性(이기심성)학이 진전하여 학자들은 이기 심성 문제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깊이 연구하였는데 학설과 견해의 차이로 여러 가지 논쟁이 일어나서 우리나라 학계의 단조로움과 적막함을 깨뜨렸다.

이 시기가 유학의 융성기로 영남에는 퇴계 李滉(이황) 남명 曺植(조식)이 있었고, 호남에는 일제 李恒(이항) 하서 金麟厚(김인후) 고봉 奇大升(기대승) 미암 柳希春(유희춘)이 있었으며 경기에는 소재 盧守愼(노수신) 율곡 李珥(이이) 우계 成渾(성혼) 등이 있었다. 그들 모두 성리학에 밝았으나 그 중에서도 퇴계와 율곡이 가장 뛰어나고 유명하여 조선조 유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 손꼽히는데 영남사람들은 퇴계를 동방의 朱子(주자)라 칭송하고 기호사람들은 율곡을 동방의 大賢(대현)이라 기리었다. 이 두 선생은 그 품격이 고결하고 학문이 점밀하고 깊어 우리나라 유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뒤 그들의 학통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퇴계학통을 이은 사람은 영남학파라 하고 율곡학통을 이은 사람들은 기호학파라 하여 양파간 치열한 논쟁으로 성리학설의 탐구는 그 심도가 깊어갈수록 내용도 매우 다양해졌다.

生涯(생애)와 저서
수암은 인조 19년(1641년)에 태어나 경종 원년(1721년)에 돌아갔다. 자는 致道(치도)이며 寒水齊(한수제)라는 호도 사용하였다. 遺逸(유일)로 천거받아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뒤에 文純(문순)의 시호를 받았다.

송시열, 송준길을 스승으로 학문에 전심, 특히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앞서 1659년의 慈懿大妃(자의대비) 복상문제로 追罪(추죄)를 받게 된 송시열이 1675년 (숙종1) 덕원부에 유배되고 남인들이 득세하게되자 청풍의 산중에서 학구에 힘쓰며 제자들을 모아 유학을 강론하는 한편 程朱(정주)의 서적을 고정하였다.

1689년 (숙종15) 己巳換局(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에 안치되어 賜死(사사) 당하게 되자 달려가서 이별을 고하고 스승의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았고 유언에 따라 萬東廟(만동묘)를 청주에 세워 명나라 신종 의종을 제향하고 숙종의 뜻을 받들어 大報壇(대보단)을 세웠다.

율곡을 祖宗(조종)으로 하여 송시열에게 계승된 기호학파의 지도자로서 율곡의 氣發理乘一途設(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했으며 그의 문인 한원진과 이간이 人物性偏在(인물성편재) 문제로 논쟁을 하자 人(인)과 物(물)의 性(성)이 동일하다는 이간의 학설에 대해 인과 물은 성이 각기 다르다는 한원진의 학설을 지지함으로 논쟁이 더욱 확대 되어 기호학파는 마침내 양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청풍의 황강서원 정읍의 고암서원 성주의 노강서원에 배향 저서는 수암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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