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현서원기(象賢書院記) 번역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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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서원기(象賢書院記) 번역문(1)
  • 보은신문
  • 승인 2006.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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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형/외속봉비
유교(儒敎)의 역사는 한마디로 교육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관학(官學)으로 중앙에는 사부학당(四部學堂)이 있고 지방에는 향교가 있으며 사학(私學)으로는 서원(書院)이 존재하여 유교문화의 질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상현서원은 전국 500여 서원 중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 사액서원이며 충북에서는 처음으로 창건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곳이다.

세인(世人)들은 보은하면 예로부터 학문의 고장 예절의 고장이라고 부러워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는 보은향교와 상현서원에서 사람이 갖추어야할 기본서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교과목으로 지정하여 많은 인재를 육성시켜 정신 문화 창달에 공헌한 덕분으로 생각하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보은 인으로 숙연한 마음과 자긍심이 들뿐이다.
이와 같이 문예(文藝)를 진작하고 풍속(風俗)을 순화하는 기능을 수행해 왔으나 광복이후 신교육 제도로 본연에 기능을 상실하고 오직 춘추제향 만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오늘 서원 책임자로서 무한한 감회와 개탄을 금(禁)할 수 없다.

이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뜻으로 본원의 연혁을 대략이나마 4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독자 여러분 보은의 문화유산을 조명하는 뜻에서 게재하는 것이오니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주)

우리나라 서원의 기원은 명종(明宗)중기에 처음으로 창건하여 선조(宣祖) 40년 사이에 융성하였는데 풍기 백운동서원이 처음이 되고 보은에 상현서원이 두 번째이다. 호서와 영남 두 지역에 서원이 존재함이 어쩌면 중국의 당송(唐宋)과 같아 천하에 이 4개 서원으로 말미암아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가 되었다. 중종(中宗)이 문 치를 펴자 선비들이 모여들고 어진 이가 조정에 나아가 옹희(雍熙)한 정치를 기대하였는데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수구파와 개혁파 사이에 정치 충돌로 사화가 크게 일어나니 군 현들이 줄줄이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 인해 선비들은 왕도를 귀히 여기고 패도를 천시함으로 국민들이 어진 이를 존경하고 도를 중요시함은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이 도학정치를 천명한 공이라 할 수 있다. 무릇 이로 인해 300년 이래로 공론들이 오직 기묘(己卯)년이 국가 최성기라하여 문정공(文正公)인 충암 김선생을 유림에 영수라 하여 그분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살던 곳에 원사(院祠)를 세워 추모하는 장소로 삼았다. 보은은 실로 문간공 충암 김선생의 고향으로 그 당시 선생에게 학문을 익히고 인격을 도야한 후학들이 많았으며 지역도 백운동과 가까워 풍문을 듣고 흥기 함이 타 지역보다 앞섰다. 그런즉 보은에 상현서원과 영남에 백운동 서원이 있기 때문에 전국에서 풍문을 듣고 다투어 서원을 건립함에 유교가 흥기하여 현인 군자들이 사문(斯文)에 공이 있는 자는 그 고을에서 추향 하지 아니함이 없는 즉 상현서원은 실로 전국의 선도 역할을 한 셈이 된다. 본 서원이 건립된 시기는 중종(中宗) 18년 서기 1523년 丁巳二月에 참봉(參奉)안황(安璜)이 건축책임을 맡아 감독하였는데 때마침 동주(東周) 선생이 보은 현감으로 부임하여 인력과 비용을 지원하니 일년이 안되어 준공을 하였다. 사우 동쪽과 서쪽에는 재실과 강당이 차례로 아름답고 주위에 담장을 쌓고 이름을 삼년성 서원이라 했으며 또한 주자(朱子)가 강학 했던 백록동서원 규약을 동쪽 벽에 걸고 인하여 원생들이 감사인 심수경(沈守慶)에 보고하니 감사가 조정에 아뢰어 명종께서는 즉시 예조에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사기(史記) 각각 한질 씩 하사하라 하여 원중에 장서하게 되었다.

그 후 대곡(大谷) 선생을 추향 하니 위차를 문간공 아래에다 봉안하고 선조 1573년 경술년에 원생들이 상소하여 편액을 요청하니 그 이름을 상현서원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처음 서원을 건립한 곳은 본현 동쪽 오정산 옛 성내에 있었는데 노수신(盧守愼) 선생의 아들인 노대해(盧大海)선생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서원을 시찰하고 위치가 협소하고 좌우풍치가 부적합하다하여 즉시 서원을 구병산 서쪽 종연(種淵) 못 위 옛 절터에다 다시 세웠다.

숙종 8년 신유년에 동주 성선생과 문열공 조선생을 추향하되 동주 성선생은 대곡선생 아래에 자리하고 문열공 조선생은 동주 선생 다음에 자리하니 위차 설정은 모든 선비들이 문정공 우암(尤庵) 송선생 한테 품정하여 정하였고 그 일은 시도(時燾) 선생이 주장하였다.  그 후 8년이 지난 기사(己巳)년에 문정공 송선생이 명을 받고 죽으니 죽은 지 6년이 지난 갑술(甲戌)년에 신원이 되자 다음해 2월 본원에 추향하고 그 자리는 문열공 아래로 하였으니 치서는 세대 순으로 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는 원사가 곳곳마다 첩설(疊設)함으로서 수호와 제사 비용이 백성들의 재력만 손상한다하여 설립을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중봉 동주 양선생 추향시 유생 안은인이가 상소하였으나 기각 당하였는데 유생 이응시 등 여러 유생이 또 상소하니 판 부사 이상진이가 말하길 한 고을에서 별도로 따로 나누어 제사하는 것은 도리어 민폐가 더 크다고 아뢴 후 허락함으로 문정공선생을 추향하게 되있다. 동주 선생은 1553년 명종8. 계축년에 보은 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펴 후생 안민한 공로가 인정되어 떠난 뒤 사모하는 뜻으로 청사 옆에 사우를 세우고 제사하였다. 그 후 70년이 지난 문정공 송선생이 병정(丙丁)난으로 보은에 온거하면서 후생들을 교육시키고 덕화를 편 공로가 막중하였기에 서원에 합향하였다.

아. 아 본원에 합향한 오현(五賢)께서 성명한 세상을 만났건만 사화로 희생한 이가 둘이요 순절한 이가 하나요. 그런 죽음을 면한 이가 두분 이지만 다섯분 모두 시의에 쫓아 생을 마친 분들이다. 비록 늦게나마 조정에 부름을 받았으나 직위가 미비하여 그 뜻을 펴지 못하였으니 현자들이 존중함과 세도의 불행함이 어찌 한결 같이 여기에 이르는 고.

서원을 건립한 다음 운영규칙을 송나라 백록동 서원을 모방하여 향중에서 연세가 높고 덕이 많은 사람을 추대하여 원장을 삼으니 처음으로 원장이 된 분은 참봉 안황이요. 그 다음은 진사 이언이요. 다음은 현감 김가기요. 다음은 찾방 이의정이요. 다음은 현감 김덕민이요. 다음은 헌납 김상이요. 다음은 준수 송시도이니 송시도는 곧 우암 송시열의 아우가 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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