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부면 구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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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부면 구암리
  • 김춘미
  • 승인 2005.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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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개의 바위가 있는 귀바위 마을
당신에게 비(雨)는 어떤 의미입니까? 사랑하는 연인에게는 낭만이요. 시인(詩人)에게는 감동이요. 우산 장수에게는 행운이요. 실연을 당한 이에게는 위안일 것이다.

그렇다면 농부에게 비(雨)는 무엇일까.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는 농부의 시름을 덜어주는 고마운 벗이요. 비 오는 날에는 모처럼 집에서 쉴 수 있으니 반가운 손님이다.

하지만 고마운 벗이 언제나 반가운 손님일 수만은 없는 게 농촌의 현실이다. 특히 탄부면 구암리 주민들은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구암리를 방문한 날은 하늘이 선심이라도 쓰는 양 봄볕 같은 햇살에 연일 계속되는 강추위로 움츠러든 어깨가 절로 펴질 만큼 포근했다. 마을에서는 오폐수 처리시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경로당에 들어서자 여느 시골 마을에서는 보기 드문 최신식 방송 시스템이 눈길을 끌었다.

구암리는‘수해지구’로 지정된 곳이다. 이미 80년, 98년 수해 당시 피눈물나는 시련을 겪었으며, 삼가천과 보청천이 합류해 마을을 지나기 때문에 장마철 재난사고에 항시 노출돼 있다.

그래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체계적인 방송 시스템을 마련 가가호호(家家戶戶) 스피커를 달아 안방에서 생생하게 방송을 들을 수 있게 했다. 또 각 반별(총 4개 반) 해당 스위치를 켜면 그 구역에서만 방송이 되는 등 기존보다 정보전달 효과가 훨씬 좋아졌다. 67호 202명 주민이 마음놓고 안심하게 생활하는데 많은 보탬이 되고 있다.

구암리 일대의 농경지는 대부분이 논이다. 타 부락에 비해 벼농사를 짓는 경지 면적도 넓을뿐더러 ‘삼가천의 맑은 물을 이용해 구암들의 기름진 옥토에서 나는 맛있는 쌀’이라 하여 구암리가 주산지인 탄부쌀은 전국에서 유명하다. 11월 13일 탄부면에서 개최한 <건강 걷고 달리기> 대회 때는 구암리를 비롯한 탄부면 일대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인 <향미(香味)>를 주민들에게 증정품으로 나눠주기도 했다.

꿋꿋하게 삶의 터전을 지켜온 주민들의 뚝심이 오늘날과 같은 마을의 번성을 일궈낸 것이다.

김상배 이장(51), 노인회장 이철우(74), 황재연 새마을 지도자(36), 최삼순 부녀회장(64)이 마을 봉사자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 마을의 상징인 아홉 개의 바위
구암리는 조선 선조 임금 때 경기도 이천으로부터 추산 이만복 선생이 임진년 전란을 피하여 낙향우거(落鄕寓居)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 안에 거북모양을 한 큰바위가 있어서 귀바위 또는 구암(龜岩)이라 일컬었다하며 상관(上官), 중관(中官), 하관(下官) 마을을 관리(官里)라 칭하여 일반적으로 관말이라고 불려져 왔다. 귀바위(龜岩) 또는 관말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마을 안에 아홉 개의 큰 바위가 있다해서 구암리(九岩里)라 개칭하였다고 전해진다.

자연마을인 귀바위와 안말(안뜸), 중관말(중뜸), 하관말(아랫말)을 통틀어 구암리라 한다.
아홉 개이던 바위(지석묘)는 경지정리사업과 수해로 땅속에 묻히고 현재 4개만 남아 있다. 이상규(58)씨 집 안마당에 1개 있고, 대문 밖에 3개 있는 것 중 1개는 반 이상이 매몰됐다.

지석묘는 마을명 유래가 거기에서 비롯된 만큼 마을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더 나아가 문화유적으로 보존할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급급한 문제는 농촌의 낙후된 의식주를 개선하고 농민을 살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구암리 6개 바위가 모두 없어지는 안타까운 현실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경지정리를 하고 농지를 만드는 데 걸림돌이었지만 이제는 남은 것만이라도 후손을 위해 마을의 상징으로 보존돼야 한다. 돈 되는 건 아니지만 돈주고도 못 사는 마을의 자랑이 아닌가.

구암리는 주변에 높은 산이 없다. 그래서 옛날에는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들녘에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었다고 한다.

산이 없는 대신 구암리는 오(五)동산으로 유명하다. 크기에 따라 큰 동산, 작은 동산 등으로 불리며 나무가 우거지고 모양새가 예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 밭보다는 논이 차지하는 비중 커
구암리의 넓은 들은 원래가 다 밭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밭농사로는 부농의 꿈을 이룰 수 없었기에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밭을 논으로 개간하기 시작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부를 대표하는 말이 천석꾼, 만석꾼이었던 것처럼 쌀 수확과 농민의 삶은 직결된다.

농부는 벼 타작이 끝나면 여름 내내 구부렸던 허리를 그제야 한번 펼 수 있다. 그만큼 벼농사는 농촌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처음에는 논에다가 구덩이를 파서 발동기를 돌려 물을 퍼올렸다. 구암리에서 자가경작으로 벼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이홍옥(63)씨의 말로는 70년 초 한 집에 발동기 2, 3대씩은 다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집에도 통통방아(발동기)가 있었는데 맨날 그거 돌리는 게 일이었어요.”

추수가 끝나면 볏짚은 주로 마로면 사람들이 많이 사가는데 짭짤한 부소득이 되고 있다. 구암리는 내년부터 시행되는 벼 재배 소득보전 직불제에 신청한 농가가 50농가이며 면적은 34만평 정도 된다.

논이 많은 대신 밭은 별로 없어 자급자족을 하는 수준 정도다. 논둑에 콩을 심어 키워 먹는다는 말에 한 뼘 크기의 땅도 가꿀 정도로 땅을 귀히 여기는 농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20농가는 농사도 지으면서 한우도 사육한다. 그 중 제일 많이 사육하는 농가가 30두 정도며, 평균 한 가구당 5, 6마리를 키운다.

그리고 3농가가 시설하우스로 방울토마토, 채소 등을 재배해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중 새마을 지도자 황재연씨는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귀농하여 부모님의 뒤를 이어 시설하우스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기반을 잡아 마을을 빛내는 인물도 훌륭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또는 고향에서 그곳을 지키며 사는 자손은 더더욱 훌륭하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 꿈을 위해, 잘 살기 위해 원하는 길을 찾아 어딘가로 떠나고 정착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향하는 곳은 도시다. 농촌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미래를 꿈꾸며 찾아드는 곳이 꼭 될 것이다.

# 꿋꿋하게 삶의 터전 지켜
80년 수해 당시 안뜸, 중뜸, 아랫말이 모두 침수되고 흙집으로 되었던 집이 전부 무너져 내리는 참사를 겪었다. 그때 면 관계자가 구암리 앞마을인 하장리로 주민들이 이주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렇게 되면 집에서 농경지가 멀어져 농사를 짓는 데 어려울 뿐 아니라 조상 대대로 지켜온 마을을 없앤다는 게 쉽지 않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터를 잡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래서 23가구로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 지금의 새마을촌이다. 나머지 13가구는 피해가 적었던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애향심을 외면하듯 하늘은 구암리에 다시 한번 시련을 퍼부었다. 98년 수해가 바로 그것이다. 보은군 전역이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구암리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 후 지역과 주민이 손을 잡고 천재(天災)로 인한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배수펌프장이 시설 중이고, 면사무소에서 수시로 기상 예보를 체크해 비가 올 경우 미리 김상배 이장에게 연락을 하면 김 이장이 새마을 지도자와 함께 밤에는 하천변 순찰을 돈다고 한다.

구암리 남쪽에 흐르는 보청천을 대냇물이라 하고 대냇물과 삼가천이 합수되는 곳을 구정부리라 한다. 그 물이 마로면 기대리 하천으로 향하는데 그곳에서 적암천이 다시 합수를 한다.

문제는 기대천의 폭이 좁아 홍수가 날 경우 많은 양의 물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물살을 가르는 다리까지 좁아 유속(流速)을 방해하니 폭우가 쏟아져 물이 불으면 그 물이 빠져나갈 수가 없어 다시 역류해 구암리를 침수시키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98년 수해이후 문제점을 인식한 행정기관에서 기대천을 넓히는 공사를 시작했으며 아직도 진행중이다.

그러나 기대천 몇 개의 다리 중 일부는 궁여지책으로 기존에 있던 다리 옆을 조금 넓혀 놓았을 뿐이고 높이가 너무 낮은 다리는 새로 지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김 이장은 기대리 하천 공사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그 결과에 구암리의 앞날이 달렸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기대리 다리를 현 실정에 맞게 다시 놓아야 나중에 홍수가 또 나도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는데 물이 다리 밑까지 차 올라와 있는 사진을 관계기관에 증거물로 제출하지 않으면 공사를 할 수 없다고 한다.

다리 하나 짓는데 적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몇십억 공사인 만큼 명확한 문제 제기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게 관계기관의 입장인 것이다.

장마철 수해 관련 보도를 보면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란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인재는 충분히 피해를 면할 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간과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정작 국민과 도민과 군민에게 필요한 행정은 뒷전이고 그들이 납부한 소중한 세금을 불필요한 공사에 퍼붓는 관계 당국의 판단력은 어디에 기준 한 현명함인가.

묻고 싶다. 당신에게 비(雨)는 어떤 의미입니까? 당신의 구두를 적시는 비를 보며 단 한번이라도 수해지구에 살며 다리 건설을 요구했던, 그러나 당신이 어쩔 수 없다 거부했던 그 주민들을 떠올려 본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의무가 아니기에...

변화는 마음을 움직일 때 오는 것이고, 이해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기초로 한다. 구암리의 넓은 들에 내리는 빗줄기가 주민들에게 반가운 손님으로 찾아와 고마운 벗이 돼주길 기대해 본다.

새로쓰는 마을 이야기(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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