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속리면 백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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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속리면 백현리
  • 송진선
  • 승인 2005.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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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교통요충지 주막거리 있는 활기찼던 마을
나문석(63) 이장이 4시 이후로 약속시간을 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것을 보고 마을을 찾았는데 마을에 도착하는 동안 해는 벌써 마을 뒤 높다란 태봉을 넘었고 벌써 산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12월2일 마을을 찾았던 날 상(喪)을 치른 집이 있었다. 64세밖에 안된 젊은 분이었다. 옛날에는 환갑나이도 넘기기 어려워 환갑나이가 마을에서는 아주 고령이었고 환갑잔치는 마을에 큰 잔치였고 경사였다.

하지만 요즘은 환갑잔치는 치지도 않고 서운하니까 여행을 하거나 가족끼리 식사를 하는 가족 모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마을회관에는 64세에 불과한 아주머니의 작고로 적적해 할 아저씨를 위로하는 동네 주민들이장례를 치르고 피로를 풀면서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슬래브지붕으로 신축해 시골마을에서 요즘 가장 좋은 집 중의 하나가 바로 경로당 또는 마을회관인데 백현리 마을의 경로당은 조립식이었다. 번듯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경로당 안은 주민들의 훈기로 따뜻했고 서로 어울려 웃음꽃 피우는 화목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렇게 내속리면 백현리는 나문석(63)이장과 나재석(69)노인회장, 박인태(48) 지도자, 김정옥(52)부녀회장을 중심으로 마을 대소사를 모두 내일처럼 나서는 모두가 한 가정 같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주 이씨와 안정 나씨의 집성촌이어서 그런 한 집안 같은 분위기가 남아있고 지금은 많이 이주해 각성받이 동네이다.■ 천주교 입성 100년돼

1886년6월 한불조약 체결로 신앙의 자유를 찾은 경상도 북부지방에 숨어 있던 천주교 신자들이 보은으로 이주해와 옹기를 굽고 토굴생활을 하며 정착했는데 삼승면 구점(현 송죽 공소)과 회남 분저실 공소이다. 보은군내 대표공소였던 것이다.

백현은 1906년 당시 신자 36명이 미사를 드렸던 공소가 있는 마을로 천주교 입성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후 신자들의 전출로 공소 운영이 어려워 1960년경 공소를 폐쇄 현재는 내속리면 사내리에 있는 속리산 공소를 이용해 미사를 올린다.

당시 이봉희(65)씨 집이 공소로 이용됐는데 증조부가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생존했다면 120세가 넘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당시 공소로 운영됐을 때 사용했던 좌대 등 옛 유물은 모두 옥천 성당에 기증해 현재는 흔적도 없다고 한다.

시골마을에 서학인 천주교가 입성하기도 어려운데 백현리 하면 산골이다. 토속신앙이 자리하고 인근에 법주사가 있어 암자들이 많았던 때를 생각하면 백현리에 천주교가 입성한 것은 이봉희씨 증조부의 종교적인 신념이 대단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증조부의 영향으로 조부와 부모 모두 천주교 신자였으며 자신도 천주교 신자라고 한다.

나문석 이장이 7, 8살 정도였던 때 공소가 차려져 있었던 이봉희씨 집에는 검은색 복장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손에는 책을 들고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언가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중얼거렸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그때 이상하게 비춰졌던 사람들이 바로 천주교 신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일찍 천주교가 입성했던 백현리에 현재 2가구에 불과하다.

■ 37번 국도가 나기 전 속리산 통하는 길목
마을 뒤를 해발 419m에 달하는 태봉이 가로막은 백현리는 마을로 통하는 길목 모두가 고개였다.

산외면 백석리 은점마을과 경계가 되는 곳에 지금 백현 송어장 식당이 있는 고개 정도 높이의 잣고개라는 고개가 있었다. 백현 송어장 앞 고개는 지금도 활고개라 부른다.

옛날 37번 국도가 마을 앞 하천 건너편 지금의 노선으로 나기 전 잣고개에서 324m높이 정도의 성고개를 지나 마을 앞을 통과해 활고개를 지나 북암리를 거쳐 속리산으로 가거나 속리산에서 청주로 향했다.

천년고찰이었던 법주사는 매우 유명한 절이었기 때문에 불교신자들의 왕래가 잦았다.

속리산 길목에 있었던 백현리는 이들에게 국밥도 팔고 막걸리도 팔고 먼 길 가는 나그네들은 잠도 잘 수 있는 주막(지금의 경로당 자리)이 있었다고 한다.

유명했던 주막거리는 타동네의 소식도 알 수 있는 창구가 됐고 주막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백현리에는 경로당 바로 옆에 ‘백현상회’라는 가게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주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데 친구가 되어주던 막걸리와 소주도 판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 부녀회가 중심이 돼 구판장을 운영했던 것과는 달리 요즘은 동네마다 차량으로 이동 슈퍼가 다니고 또 교통 발달로 구판장은 없어진지 오래인데 백현리에서 가게 운영되고 있는 것이 색다르게 보여졌다.

시골에서 가게는 장이 서는 마을이나 산외면 장갑리와 같이 국도 등 차량 왕래가 많은 도로변 마을, 아니면 외속리면 서원리처럼 관광객(피서객)들이 많이 찾는 마을 아니고는 상점이 운영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백현리는 국도 변도 아니고 관광객이 몰리는 곳도 아닌데 가게가 운영되고 있는 것은 주막거리가 형성됐던 옛날 전통이 지금에 와 변형된 모습이란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백현상회 앞에는 다 먹은 2ℓ들이 플라스틱 막걸리 병이 비닐에 가득 담겨있었다.

■ 적을 막던 곳 피난도 하던 곳
옛날 백현리는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이를 증명할 만한 증언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골짜기에 얽힌 전설과 골의 지명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백현산성이다. 마을의 북서쪽에 위치한 성고개라 불리는 곳에는 둘레가 242m 정도 되는 돌 성인데 이 마을이 속리산에서 청주로 통하는 길목이 되므로 청주로 행하거나 청주에서 오는 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물어진 것인지는 몰라도 삼년산성이나 호점산성과 같이 차곡차곡 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돌을 무더기로 채워놓은 모습이었다.

돌 성의 안은 약간 경사는 있지만 평탄했으며 과거에는 없었을 것 같은 수령 3, 40년생 정도의 밤나무가 서식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수무니골(水門谷)이다. 잣고개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골이 길어 6·25때에는 이곳에서 피난을 했다고 한다. 한 때 골 안에 사람들이 거주했는데 다 떠나고 지금은 새로 한 집이 축사를 하며 살고 있다. 마을에서 보면 백현 송어장 식당 쪽으로 한 가구가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마지막은 방두골로 마을 주민들은 방적골이라 부르는데 돌 광산이 있었던 곳을 말한다. 적을 방지하기 위한 골짜기라 불리고 그 안에는 큰 바위가 골 입구를 막아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아 적의 동태를 살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는 것.

이같이 교통의 요충지요,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을 받았었던 백현리는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은 주민들이 떠나고 지금은 23가구만 살고 있다.

■ 흰 돌 물다리기 놀이의 한 마을
백현리는 보은읍과 내속리면 산외면을 경계로 하는 국사봉이 있는데 산외면 경계마을이 바로 백현리와 이름이 비슷한 백석리 흰 돌 마을이다.

백석리에서는 당구봉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뻗어내린 두개의 큰 샘은 300여년이 넘도록 마른 적이 없어 마을에서는 풍요를 주는 영험한 곳으로 물을 지켜왔다.

산봉우리 넘어 바로 아랫마을인 백현리는 상대적으로 물이 귀해 백현리 주민들로 부터 시샘을 받았고 백현리에서 물을 가져가면 그 해 샘물이 마르고 흉년이 들어 주민들은 샘 지키기에 사활을 걸었다.

후에 두 마을은 물의 신성함을 알고 함께 샘 고사를 지내는 등의 전통이 50년까지 이어졌고 함께 흰돌 물다리기라는 전통놀이를 벌였으며 1987년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 때 이 전통놀이를 재현해 국무총리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금도 백현리의 물 사정은 좋지 않다. 그래서 나문석 이장은 먹는 물에 대한 고민을 면장에게 털어놓고 옛날 주민들이 사용했던 샘물을 복원해줄 것을 건의했다.

그것이라도 복원이 되면 먹는 물의 사정이 좀 나이질 것이라며 주민 숙원이라고 말했다.
현재 나이가 63세인 나문석 이장이 거주 주민 중 가장 젊은 고령화된 마을에서 먹을 물이라도 제대로 확보해줘야 할 것 아니냐는 나 이장의 주장에 수긍이 갔다.

농업을 주로 하고 있지만 트랙터 1대가 고작이고 콤바인 한 대가 없으며 가장 많이 농사를 짓는 사람이 남의 땅까지 합해 4000평에 불과할 정도로 마을 경제사정은 낙후됐다.

하지만 91세로 최고령인 나재석 노인회장의 모친의 건강한 모습과 몇 안되는 주민들이 돈독한 정을 나누면서 긴긴 겨울을 서로 부비면서 따뜻하게 보내는 마을.
해는 일찍 서산으로 졌지만 햇살이 준 따사로운 여운은 길게 마을을 감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새로쓰는 마을이야기(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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