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정사·익재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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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정사·익재영당
  • 송진선
  • 승인 2005.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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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는 우리의 정신이 녹아 있는 곳
올해 3월부터 매달 한 차례씩 군내 곳곳의 문화유적지를 기행하는 문화기행을 이번 마로면 관기리 고봉정사와 탄부면 하장리 익재영당 탐방을 끝으로 마감한다.

첫 회에는 일본 명치천황이 죽자 상복입기를 강요하는 일제에 항거해 이를 거부하고 청벽산 낭사대에 올라가 장렬히 순절한 내북면 봉황리 이승칠 의사 유적지를 기행한 것으로 비롯해 지역 곳곳에 미약하지만 기행의 흔적을 남겼다.

많은 주민 특히 어린이들에게 우리 지역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학생들의 동참을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1년을 마감하며 가장 아쉬움이 남는다.

아직은 재미있는 역사이야기 보다는 역사는 무겁고 딱딱한 것이고, 놀이공원으로 놀러가듯 찾아가는 문화유적지이기 보다는 유적지에서는 조용해야 하고 엄숙하게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다.

그래서 문화유적지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 않다. 특별한 날 뭔가 꼭 숙제를 해야 할 것이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찾게 되는 그런 곳이 되었다.

아마도 먼 훗날에는 문화재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그 문화유적지는 관에서 매달 얼마씩 돈을 줘 고용한 관리인만이 여름이면 풀을 깎는 곳으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다. 또 담당하는 공무원만이 돈을 들여 고칠 곳은 없나 점검하는 곳이 될 수 있다.

자료와 사진 모두 인터넷에서 구축해놓은 것을 다운받아 활용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현장탐방까지 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유명한 유적지가 아니고는 그리고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촬영장이 되지 않는 이상 거의 모든 문화유적지는 앞으로는 인터넷이나 고서 속의 문화유적지가 될 수도 있다는 아찔한 예상을 했다.

지역문화 창달에도 기여해야 하는 지역언론으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을 다시 한 번 통감하며 아쉽지만 이번 호를 마감으로 올해 문화유적지 기행을 마감한다. (편집자 주)

마로면 고봉정사와 탄부면 익재영당 기행에는 삼년산 향토사연구회에서 최규인회장을 비롯해 최회장 님 부인, 구춘서·남광우 회원, 마로면에서 구철회 전 보은향교전교와 김진권 회인농협 회남분소장이 함께 했다.

먼저 찾은 마로면 관기리 고봉정사에는 약속시간보다 늦게 간 일행을 기다리는 구철회 전 전교와 김진권 소장이 있었다.

날씨까지 쌀쌀해 미안한 마음에 몸둘 바를 모르고 있는데 김진권소장이 자신도 몸이 으슬으슬한지 주먹밥과 따끈한 콩나물 국, 커피를 내놓으며 몸부터 녹이자며 도시락을 풀어놓는다. 어쨌든 주먹밥과 따끈한 콩나물국으로 몸을 녹였다. 그리고 커피로 입가심까지 했다.

농부들은 아침나절 열심히 일하고 걸죽한 막걸리와 국수로 새참을 먹었지만 기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새참부터 챙겨 민망했지만 어쨌든 배가 든든하니 추위도 사라졌다.

굽은 어깨도 활짝 피고 고봉사에서 예를 갖춘 후 고봉정사를 둘러봤다. 충북 지방기념물 제 51호인 고봉정사는 고봉 밑에 있는 고적으로 삼현정이라고도 했다.

# 고봉 정상에 정자 복원해야
옛날에는 삼가천과 적암천의 물길이 지금과 크게 달랐다. 지금은 고봉정사 뒤로 나있는 적암천 물길이 고봉정사 앞으로 흐르고 삼가천도 고봉정사를 끼고 돌았다고 한다.

지금은 섬이 아니지만 옛날에는 물위에 둥둥 떠있는 섬이었던 것이다. 고봉과 인연이 있었던 사람은 바로 충암 김정 선생이다.

조선 중기에 충암 김정은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하면서 삼파연류봉(三派蓮溜峰)을 고봉(孤峰)이라 하고 올라가 아름다움을 보고 즐기며 스스로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김 정 선생의 호는 충암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고봉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후에 원정 최수성 선생이 고봉 즉 산 꼭대기에 정자를 건립해 그곳에서 벗들과 시를 읊으며 지냈다.

이후 1519년 중종 4년 기묘사화 후 이곳으로 낙향한 병암 구수복 선생이 이를 이어받았다. 구수복 선생이 이곳에서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치고 벗들과 학문을 연마하며 지내는 동안 고봉정은 유명한 선비들의 강학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구수복 선생 후 산 정상에 있었던 고봉정은 퇴락했고 구수복 선생의 5대 손인 일봉 이천(爾天)이 고봉 아래로 옮겨 지금의 건물로 지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조 유명한 석학들이었던 김 정 선생과 최수성 선생, 구수복 선생이 각기 고봉에 머무르며 시를 읊고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가르친 유서깊었던 고봉정의 복원이 필요하다.

그래야 김 정 선생이 삼파원류봉인 이곳을 고봉이라 이름지으며 자신의 호(號)로도 명명했고 최수성 선생이 그 곳에 정자를 지었고 구수복 선생이 은거한 그 곳에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건물은 2단으로 쌓은 석축을 기단으로 하고 그 위에 정방형에 가까운 모양의 덤벙주춧돌을 놓고 민흘림으로 된 둥근 기둥을 앞면에 4개, 옆면에 3개씩 세워서 앞 면 3칸, 옆 면 2칸 규모로 지었다.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 같은 데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들은 익공식(翼工式)이며 처마는 겹처마 지붕은 팔작이다. 평면의 구성은 오른 쪽에 온돌 방, 왼쪽에 우물마루 방, 마루사이에 기둥을 둔 형식이다. 기둥사이에 분합문(分閤門)을 두어 두 공간을 연결하고 있다.

건물 밖은 온돌방에 쌍여닫이문을 닫고 마루에는 앞에 분합문을 옆면과 뒷면에 각각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정사 현판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것이다.

한편 1981년 정사 해체 후 보수할 때 최수성 선생, 김 정 선생, 구수복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고봉사, 관리사, 창고 삼문 등을 새로 지었다.

고봉사 현판은 최규하 대통령의 휘호라고 하는데 우암 선생의 필체와 크게 비교됨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다.

# 능성구씨 보갑도 보유
이곳에는 2001년 3월 도 지정 민속자료로 지정된 능성 구씨 보갑도 있다.

능성 구씨 보갑은 특이한 형태의 석조 보갑으로 유사시에 족보를 위시한 선조들의 유고 등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지하에 매몰할 수 있도록 제작된 희귀한 석 함으로 비교적 완형을 유지하고 있어 민속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 것이다.

당초 담을 두르기 전에는 보갑이 정사 뒤 편에 있었는데 담을 두르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고 구철회 전 보은향교 전교는 전했다.

능성 구씨 보갑은 숭정 경진년(1640년)에 병암 구수복 선생의 현손인 낙주 구봉서 선생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재질은 화강암으로 석 함 표면에 ‘능성 구씨 보갑’이라는 글씨를 음각했다.

보갑의 크기는 가로 80cm, 세로 56cm, 높이 84cm로 상하가 분리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조선 중기의 족보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식구조를 살필 수 있고 조선시대의 판목 및 서적의 보존법 등에 대해서도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어 민속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염수제 안내판에 익재영정 설명이라니
탄부면 하개리에 위치한 익재영당의 현판은 염수제(念修齊)로 되어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다. 지명지나 보은군지 어디에도 염수제에 대한 설명은 없고 익재영당으로 설명되어 있다.

만약 익재 이제현을 찾아 나선 이들이 염수제라는 현판을 보고 과연 익재영당이 맞을까 고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에는 익재영당이나 염수제에 안내가 아니라 당초 사당 내에 봉안돼 있던 익재영정에 대해 안내하고 있다.

전혀 현실과 맞지 않는 안내간판으로 문화재 및 문화유적 관리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를 관리하는 기관에서조차 관심이 없는데 일반인들처럼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이들은 더 알아봐서 무엇할까. 아마 마을 주민들 중에서도 관심이 있었다면 안내간판과 염수제와 맞지 않다며 군에 정정을 요구했을 수도 있으나 지금까지도 그대로 방치돼 있는 것을 보면 군이나 주민이나 모두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제실의 이름을 염수제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익재영당이라는 안내판 설치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 염수제 맨 앞 동 내려앉는 중
염수제는 삼문까지 총 3동으로 전면에 염수제라는 제실이 있고 그 뒤에 영당이 있는데 그 사이에 내삼문을 설치하고 담장을 둘렀다. 염수제라는 현판은 미호 김원행의 글씨라고 하며 내부에는 익재선생 영정각 중수기가 걸려있다.

맨 앞 동 염수제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건물은 앞에서 보기에 2층 규모이다. 1층은 안으로 통하는 대문이고 위로 건물이 올라서 있는데 건물이 낡아 동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다.

또한 2층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는 아래도 가라앉고 있는 중이다.
연산군 10년 눌헌 이사귄이 폐비 윤씨 복위를 반대한 죄로 탄부면 하장리 진미 마을에 부처되었을 때 건립한 것으로 건물 외벽이 시멘트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 중수한 것이 분명한데 언제 중수했는지는 군지나 지명지 등에서 찾을 수가 없다.

이곳에 봉안돼 있는 영정의 주인공인 고려 말의 시인이자 성리학자인 경주 이씨 익재 이제현은 공민왕 때 우정승을 두 번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다가 1357년 벼슬을 떠났으며 왕명으로 실록을 편찬하고 종묘 위패의 서차(序次)를 정했으며 사후 공민왕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한편 도 유형문화재 72호로 이곳에 보관됐던 익재영정은 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국보 익재 이제현 초상화 정본의 부본으로 1998년 도난당했다가 99년 서울에서 되찾았다.
보은군과 종중에서는 보관의 어려움을 들어 박물관에 위탁보관하고 현재는 사본을 봉안하고 있다.

하장리 경주 이씨의 선조이자 고려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이제현 선생의 영당이 보은에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후손들의 보다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 흔적을 남겼다.


<우리고장 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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