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북면 서지리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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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북면 서지리 - 25
  • 송진선
  • 승인 2005.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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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빈낙도하는 내북면의 시작이요 끝인 마을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알싸하게 찬 공기가 목덜미를 스친다. 오히려 춥다는 느낌보다는 상쾌한 느낌이다.

내북면 서지리를 찾아간 날은 늦은 가을비가 내린 다음날이었다. 기상정보로는 기온이 크게 떨어져 추울 것이라고 겁을 줬던 날이었다.

푸른 하늘을 이고 이제 막 잎을 지운 단풍나무 가로수 길을 달려 찾아간 내북면 서지리는 자칫 지나치기 십상이겠구나 할 정도로 마을은 크게 특징이 없었다.

배산임수(背山臨水). 마을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한다. 서지리도 산을 등지고 국도를 건너 마을 앞에는 큰 하천이 흘렀다.

전형적인 마을 형태였지만 산이 마을 뒤쪽뿐만 아니라 양쪽을 에워싸고 있어 마을이 앉아있는 부지가 넓지 않고 좁은 아담한 마을이었다.

서지리는 보은 쪽에서 내북면 소재지로 향할 때는 내북면의 첫 동네이지만 내북면 소재지에서 보은으로 향할 때는 내북면의 끝인 마을이다.
취재약속을 한 이 마을 유윤봉(70)이장을 만나기 위해 콘크리트 포장이 잘돼있는 안 길을 따라 경로당을 찾았다.

겨울철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 주민들의 제 2의 집이 되는 경로당은 역시 이 마을에서 제일 좋은 집이었다. 전에 이장을 봤던 윤광용(67)씨와 노인회장인 김종구(74)씨와 함께 마을의 이모저모에 대해 알아봤다.

20호 6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서지리는 이장 유윤봉씨와 노인회장 김종구씨, 부녀회장 황옥단(55)씨, 새마을지도자 김홍록(39)씨가 마을일을 보고 있다.# 먹을 물을 찾아 정착한 곳

서지리가 현재의 위치에 정착하게 된 것은 마실 물을 찾았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서지리 주민들의 조상들은 처음에는 현재의 자리가 아닌 동쪽으로 두 번째 골에서 마을을 형성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먹을 물이 부족해 조상들이 이주 보따리를 싸고 정착한 곳이 바로 옆 골이었고 이곳에도 먹을 물이 풍부하지 않아 다시 보따리를 싸서 풀어놓은 곳이 바로 지금의 마을인 서지리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살기 좋은 곳이라 터골이라 했으며 마을 형태가 삼태기 모양이다. 자연마을 명으로는 ‘서갖’이라고 했는데 서갖은 ‘섭갖’이 변한 것으로 ‘섭’은 ‘섶’의 고어로 나뭇가지가 우거진 것을 뜻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서지리(西枝里)라 했다.

먹을 물을 찾았기 때문에 정착한 것이지만 사실은 지금도 마실 물이 풍부하지는 않다. 암반관정을 이용해 각 가정에 물을 공급하고 있는데 주민수도 적어 평소에는 물이 달리지 않지만 명절 등 한꺼번에 많은 물을 써야하는 때는 지금도 물이 달린다고 할 정도로 물이 풍부하지 않다.

하지만 상궁저수지를 이용한 보청저수지 물을 용수로 공급받고 있는 마을 앞 논은 크게 가뭄 걱정 없이 논농사를 지을 수 있다. 때문에 주민들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

# 주민들 “면내 가장 영세한 마을”
마을 부지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지만 서지리는 특별히 소득을 올릴만한 작물이 없다.

벼농사와 고추가 주 경제작물이고 과수원 하나 없는 마을이다. 요즘 돈이 되는 한우를 사육하는 농가도 3가구에서 5마리를 사육하는 것이 고작이다.

농업마을이지만 가구당 자기소유의 농지는 1000평이 채 안된다. 500평인 농가도 있고 800평인 농가도 있다. 가구당 경작 농지는 대부분의 농가가 3000평정도 되지만 거의 남의 소유 농지를 임대해 경작하는 셈이다.

그래서 가구당 순 소득은 불과 500만원도 채 안된다는 것이 이 마을 주민들의 주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이 농지가 남의 소유이기 때문에 사육제등을 기준으로 농사를 지어봤자 벼 100가마를 수확하면 40가마는 논임자가 먹고 농사를 지은 사람이 갖는 60가마로는 농약 값, 농기계 임대료 등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것이다.

결국 벼농사는 거의 주식으로 사용할 뿐 생활비는 고추나 콩 등의 밭작물에 의존하고 있는데 밭 면적도 적어 주민들이 손에 쥐는 순 소득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올해는 추곡수매 폐지 등 급격한 정부의 쌀 정책의 변화가 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쌀값이 급격히 하락, 그나마 쌀농사로 연명하는 주민들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서슴없이 내북면 내에서 가장 못사는 마을이라고 주장했다. 마을에는 경운기 외에는 트랙터나 콤바인 등 농기계가 없어 벼를 베거나 논을 갈 때 다른 마을 주민들의 손을 빌리고 있다.

주민들은 살림이 어려운 것이 삼태기 모양인 마을의 형태와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마을 앞을 공원을 만들어 나무를 심는 등 막아놓았다고 한다.

삼태기는 물건을 채우면 앞이 터져 있기 때문에 채운 물건이 샌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 부가 밖으로 새지 못하도록 2004년 공원을 조성해 막았다는 것이다.

이 공원부지는 출향인인 권재익(대전 거주)씨가 430평 정도를 마을에 희사해 조성한 것인데 주민들에게 경제적인 부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고 있어 더욱 고마움을사고 있다.

# 마을 대부분의 토지는 능성 구씨 소유
이렇게 마을형태를 바꿔서라도 넉넉해지길 바라는 서지리는 땅의 대부분이 능성 구씨들의 땅이다.

현재 주민들의 화합의 장소인 경로당도 능성 구씨 종중 터이다. 2000년 건축된 경로당과 주차장으로 쓸 수 있는 경로당 주변 마당까지 100여평에 대해 연 쌀 1가마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있다.

능성 구씨 소유의 땅은 이뿐만이 아니다.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터뿐만 아니라 산, 농지 등 땅의 대부분이 구씨 종터이다. 주민들에 의하면 90%이상이 구씨 종터라는 것. 바로 마을 주민들의 살림이 영세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형편이 넉넉하면 터 도지를 주지 않고 매입해 내 이름으로 된 땅문서도 갖고 집도 지을 수 있겠지만 마을 주민들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땅을 매입할 형편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인지 집집마다 마당이 참 좁다. 터가 넓으면 그만큼 터 도지를 더 줘야 할 테니까 마당이 좁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콩이며 벼며 이런저런 농산물이 마당 가득 쌓여있는 곡식을 보며 마음이라도 풍성해지는 가을철 농촌의 풍경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 애국지사 윤정훈 난 곳
이렇게 마을이 가난한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주민들은 예로부터 당시 서당으로 이름을 얻었던 독립유공자 윤정훈씨 사랑방에서 논어, 맹자, 명심보감을 읽기에 바빴다. 천자문을 떼는 것은 아주 기본이다.

농사를 열심히 지어 뒤주에 쌀이 가득 하고 창고에도 볏가마가 가득 쌓여있어 보릿고개 없이 일년 열 두 달 식구들이 모두 배불리 먹어야 한다는데 대한 관심보다 배고픈 지식창고를 높이 쌓는 것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다고 한다.

자고 나면 천자문 책을 끼고 서당에 가기 바빴고 지금 이 마을의 원로들이라고 할 수 있는 어르신들이 대부분 한학을 공부했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사랑방을 내 서당을 열고 한학을 가르치고 선비정신을 가르쳤던 독립유공자 윤정훈씨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서지리에서 태어난 고 윤정훈 옹은 1919년 2월 친분이 두터웠던 손병희로부터 거사 밀령을 받고 독립선언문을 입수해 세를 규합한 후 자신의 마을 뒷산이었던 갓빈데산에서 내북면 산성리 노고산성과 산외면 관모봉(冠帽 峰), 내속리면의 문장대를 거사장소로 정해 일제히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결국 일제에 의해 체포돼 옥고를 치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윤정훈 지사의 묘소는 내북면 아곡리 윤씨 종중 산에 있었으나 올해 11월8일 대전 국립묘지로 옮겨 안장했다.

주민들은 윤정훈 지사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 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을 펼쳤다는 산의 8부 능선과 9부 능선쯤 되는 곳에 대한민국을 측량할 때 쓰는 측량기점이 있는 마을 북쪽에 있는 해발 416m의 갓빈데산을 유적지로 삼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조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쳤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런 조상들의 보살핌으로 아무 탈 없이 지낸다는 것이 감사해 하면서 마을 동쪽과 서쪽입구에 있는 돌탑과 현재 공원 내에 있는 선돌을 동구지신(洞口之神)이라 부르고 매년 음력 1월14일 주민 중 제관을 선정해 동제를 지내고 있다. 모두가 마을의 안녕과 함께 자식들 별 탈 없을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크게 마을에 흉흉한 일이 없었고 크게 출세하고 부유한 사람도 없지만 대처에 나가있는 자식들도 그런대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면 되는것 아니냐는 주민들. 비록 살림은 영세하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그 안에서 안빈낙도의 삶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이 마을 앞을 막아놓은 공원이 제발 마을에 부를 가져다주길 바라면서 마을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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