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북면 오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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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북면 오동리
  • 송진선
  • 승인 2005.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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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지에 회인현내 가장 살기 좋은 마을로 기록
아주 오랜만에 마을을 찾았다. 11개 읍면을 순회하면 읍면당 1 개마을씩 선정해 소개하는데 회남면 조곡2리 마전사 마을을 소개한 후 5주일만에 ‘새로 쓰는 마을 이야기’로 회북면 오동리(이장 이수창, 73)가 등장하는 것이다.

회북면 오동리를 찾아가는 길. 그곳에서 만난 수리티재는 불타는 듯한 강렬한 단풍이 아닌 갈색 물감을 풀어놓은 수수한 가을을 감상할 수 있었다.

수확을 끝낸 가을 들녘이 넉넉함으로 다가온 것은 아니지만 가을로 마음을 채색하며 유유자적하게 드라이브를 즐겼다.

등산 한 번하지 못하고 그저 주변 산에 펼쳐놓은 단풍을 보는 것만으로 이 가을을 마감하게 생겼다는 허무한 생각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오동리에 도착했다.

마을 외양은 주거환경이 비교적 깨끗하게 정비된 마을이었다. 84가구 21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오동리는 이수창 이장과 윤규훈(78) 노인회장, 정구순(58) 부녀회장, 우인제(58) 새마을지도자를 중심으로 잘사는 마을을 위해 주민 모두가 단합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있다.

# 양지 말과 음지 말
오동리는 한 쪽 마을은 서향에 위치해 있어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음지 말(44가구)과 해도 일찍 뜨고 늦게까지 해를 볼 수 있는 양지 말(40가구)로 구성돼 있다.

회북면 오동리라는 행정상, 법적 단일 마을이지만 작은 고샅길도 아닌 국도 25호선을 사이에 둔 완전히 다른 마을로 보인다.

그러나 주민 단합만큼은 국도 25호선이 갈라놓지 못하고 양지 말과 음지 말이 많이 떨어져 있지만 콩 한쪽도 나눠먹는 다정한 이웃사촌의 정을 나누며 살고 있다.

마을 이름만으로 봐서는 양지 말과 음지 말의 일조량에도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음지 은 일찍 해가 떨어졌지만 이수창 이장은 마을의 고도차이가 나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음지 말이나 양지 말 지역에서 생산하는 고추, 마늘, 옥수수, 고구마, 감자 등 마을의 주 소득 작물은 햇볕을 나눠먹으며 맛있게 자라 오동리 주민들에게 경제적인 부를 가져다 주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양지식물인 벼가 자라야 하는 논은 대부분 음지 말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음지 말에 있는 논에 용수를 공급하는 오동 저수지는 60년대 오동리 주민들이 정부로부터 밀가루 노임을 받으며 점토를 박아 물이 지하로 빠지지 않고 또 새지 않도록 제당공사를 해서 만든 것이다.

축조된 지 40년이 넘는 오동저수지는 오동리 전체 농경지와 일부 고석리 농경지에도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는데 8만평에 이른다.

대부분 큰 저수지의 경우 농업기반공사에서 관리하는 것과는 달리 오동저수지는 주민들이 축조한 것이라 현재 마을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1년 임대료 150만원에 임대를 놓아 낚시터로도 이용돼 청주와 대전 시민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 평당 10만원 호가 매물 나오기가 무섭게 거래
면소재지도 아는데 오동리 지가는 매우 높게 형성되고 있다. 청원∼보은∼상주간 고속도로 IC 위치, 마을 앞을 통과하는 국도 25호선 4차선 확장 등 기반이 좋아지면서 3, 4년 전부터 오동리 지가는 무섭게 올랐다.

청원군 피반령과 경계지역인 오동리는 군내에서는 청주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어 전에도 청주 지역에서 부동산을 매입한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다.

대청댐 특별대책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토지 이용도가 크게 떨어지는데도 평당 10만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3, 4만원 정도 하는 인근 지역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다.

이는 실제로 마을 회관 및 창고, 마을 광장 등 놀이시설을 설치한 곳도 평당 10만원씩에 부지를 매입해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들어섰다.

다른 곳은 빈집이 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곳은 빈집이 없다. 매물도 나오지 않고 매물이 있는지 조차 소문이 나지 않고 자기들끼리 조용히 거래해 오동리 땅을 사고 싶어도 사지 못할 정도라는 것. 그래서인지 마을 주민들은 오동리 주민이라는 사실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최근에는 한국 수자원공사가 대청호 상류지역을 대상으로 수변구역으로 묶어 행위를 제한하면서 물이용부담금으로 행동을 제한하는데 보상을 하고 있다.

그 보상에는 마을 주민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데 오동리 주민들은 2003년과 2004년, 2년 동안 오동리에 배정된 자금을 사용하지 않고 모아서 창고 등을 건축할 수 있는 부지를 매입했다.

그리고 올해 창고를 건축하고 허리돌리기, 철봉 등 주민들이 간단하게 운동을 할 수 있고 또 휴식도 취할 수 있는 휴게공간을 설치했다.

육각 정자도 수리하고 등나무가 있던 자리에도 파고라와 벤치를 설치하는 등 마을 단위 공원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비됐고 집집마다 스피커를 달아 줘 이장의 각종 방송내용을 듣는데 보다 편리해졌다.

창고 앞부터 마을회관 뒤까지 광장 바닥 공사만 완료하면 창고 설치 및 주차장 설치 사업은 마무리된다.

마을 창고는 벌써부터 요긴하게 쓰고 있다. 집집마다 보관해야 할 창고에는 농협수매용 볏가마를 집집마다 구분해 쌓아놓았다. 집이 비좁아 농산물을 적재해놓을 장소가 마땅치 않은 주민들에게는 여간 요긴한 곳이 아니게 보였다.

이렇게 마을 환경이 잘 정비된 오동리에도 과연 숙원사업이 있을까 싶어 현안사업이 있느냐는 물음에 왜 없느냐며 이수창 이장은 농로포장, 농수로의 유자 흄관설치 등이 우선 시급하다고 말했다.

# 600살 역사의 느티나무 마을 수호
음지 말에는 수령 600살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만으로는 아마도 내속리면 사내리 600살 정이품송이 친구쯤 되지 않을까 싶다. 정이품송처럼 국가가 애지중지 관리하지는 않고 또 관광객들의 기념사진으로 애장되지는 않지만 느티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이라고 여기는 주민들에게는 정이품송보다 더 큰 보살핌을 받고 있다.

매년 칠월칠석날 주민 중 생기복덕인 사람을 골라 이를 제주로 해서 느티나무에서 칠석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는 아주 오래된 마을의 전통으로 마을의 안녕과 마을 주민들의 건강과 아무 탈 없이 1년 무사하게 지낼 수 있도록 기원하는 행사인데 칠석제에서 정성을 드리고 나면 마을 주민들은 드디어 할 것을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하다고 한다.

주민들이 이렇게 의지하고 있는 느티나무는 한때 현재 엘지통신의 전신인 금성통신공사의 상징수 였다고도 한다.

연고는 지금은 작고한 과거 금성통신공사 사장을 지낸 회북면 중앙리 출신인 고 정락용씨가 수세가 왕성한 오동리 느티나무를 위해 처음에는 쌀 3가마를 주는 등 관심을 표하면서 시작됐다.

이후에는 100만원정도씩 기부해 지금은 이 돈만으로도 이 마을의 수호수 느티나무에 지내는 제수용품 값은 충분히 된다고 한다. 올해도 칠석제를 지냈는데 그 때문인지 마을에 큰 탈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매년 제를 지내는 것에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지금은 갈색 옷으로 갈아입은 예사롭지 않은 느티나무는 국도 25호선을 타고 청주를 갈 때 오동리 왼쪽 마을을 보면 찾을 수 있다.

# 현 내에서 사람살기 가장 좋은 마을
보은문화원 발간의 보은 지명지에서는 1 오동, 2 거교, 3 중리(中里), 4 황평(黃坪)로 오동리를 예로부터 회인현에서 사람살기 가장 좋은 마을이라고 적고 있다. 오동리의 옛지명은 먹울이다. 마을의 형태가 큰 새가 오동나무에 집을 짓는 모양과 닮았다고 하는 먹울은 ‘머귀울’이 변해 머굴이 되었고 ‘머귀’는 오동(梧桐)의 고어이다.

그런데 먹울 즉 오동이 회인현 내에서 사람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냥 보기에는 별다른 소득작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기름진 농경지를 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 사는데 필수조건인 먹는 물이 흔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산골짜기의 계곡수를 식수로 사용할 정도다. 다행히 암반관정을 파서 내년쯤이면 배수관 설치공사를 끝낼 것으로 보여 청정 지하수를 식수로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동네에 옛날에는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딸 하나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그 딸이 시집을 갈 때 딸의 나이만큼 자란 오동나무를 베어서 장롱을 만들어 보냈다고 할 정도로 오동나무 장은 가장 좋은 혼수였다고 한다. 사람이 죽었을 때 사용하는 관도 오동나무 관에 옻칠을 한 것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

당연히 오동나무 수요는 많았을 테고 그 덕분에 오동리에서 자란 오동나무를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까. 지명이 오동나무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면 잘 자란 오동나무는 동네 주민들에게 부를 축적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 살기좋은 마을이라고도 하지 않았을까.

농작물 수확이 거의 끝난 오동리 들녘은 지금 소먹이용 볏짚을 거두고 있는 농민 몇 명만이 보인다. 농민들의 1년살이가 다 끝나가는 셈이다.

이제는 11월15일 문을 열어 이듬해 농사가 시작되는 3월1일 문을 닫는 마을회관으로 주민들이 모여들 참이다.

1층은 대처에 나가있는 자식들 얘기며, 손자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2층에서는 쑤신 허리와 어깨를 손자대신 안마해주신 침대에 눕기도 하고 헬스기계로 자전거도 타고 걷기도 하며 건강을 다진다. 주민들의 다복한 웃음소리가 벌써부터 터져나오는 듯 했다.

<새로쓰는 마을이야기-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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