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문화기행 - 외속리면 서원.장내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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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문화기행 - 외속리면 서원.장내리 편
  • 보은신문
  • 승인 2005.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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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의 발원지, 서원계곡을 따라....(3)
4. 우리가 알아야 할 다섯 분의 선비
여러 의미에서 서원.장내리에 사는 이들은 참으로 축복 받은 분들이다. 아름다운 산이 있고 그 산의 정기를 받은 계곡의 맑은 물이 마을 앞을 흐르니 아마 특별히 공부하지 않더라도 어느 만큼은 자연스럽게 수양이 쌓아질 것이니 말이다. 옛 사람들은 그런 길지를 놓치지 않았다.그리하여 그런 곳에 집을 지어 살고 가르쳤으니 그것이 선정훈가의 ‘관선정(觀善亭)’이요 ‘상현서원(象賢書院)’이다.

상현서원은 지정문화재로써 충북기념물 제43호이다. 1610년에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았으니 소수서원에 이어 우리나라 서원의 두 번째가 된다. 1555년 명종 때 삼년산성 안에 지었던 것을 1672년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1)상현서원에 대하여
조선조에 있어 서원은 향교와 마찬가지로 성리학을 공부하는 중등교육기관이면서 선현에 대해 제사지내는 두 가지 기능을 하였다. 향교가 관학이라면 서원은 사설교육 기관이란 차이점이 있다.

조선 후기에는 향교보다 서원이 더 융성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일부 양반들 이 서원을 중심으로 백성들을 괴롭힌다는 이유 등으로 대원군에 의해 폐쇄되었다.

상현서원은 1555년(명종 10) 당시 보은현감 성제원 선생이 삼년성 내에 충암 김정(金淨)선생을 향사하기 위해 지어 ‘삼년성서원’이라 하였는데, 1610년에 ‘象賢’이라 사액을 받았다. 1672년(현종13) 삼년산성에서 지금의 위치인 외속리면 서원리로 옮겼고, 1681년에 대곡 성운(成運)과 보은현감을 지낸 동주 성제원(成悌元), 중봉 조헌(趙憲) 선생을, 1695년에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선생을 추가하여 배향하였으니 모두 다섯 분이시다. 1977년 12월 6일 충청북도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다.

(2)선비란 누구인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공동체의 이상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강한 성품과 고매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조선시대에 있어 그들을 선비라 하였다. 선비는 삼국시대 이후로 우리 역사에 이상의 깃발을 높이 올리고 구현하기 위하여 헌신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요 신념으로 삼았다.

선비는 두 가지의 방법으로 자신을 다듬어 간다. 하나는 학문을 통해 자신의 식견을 높이는 일이요, 하나는 수양을 통해 그 마음을 부드럽고 굳세게 다듬는다. 학문과 수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요 평생을 지속하는 과업이었으니 선비란 평생 독서를 쉬지 않는 ‘讀書人’이며, 독서를 통해 진리의 근원을 통찰하고 현실에 대한 대응방법을 발견해내는 ‘知性人’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어 선비의 활동양상은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학문을 닦아 자신의 학문체계를 정립하고 후생을 가르치는 강학형 선비. 둘째, 스승을 찾아 학문을 더욱 연마함은 물론 벗을 사귀어 서로 갈고 닦음으로 믿음으로 결속된 ‘士林’을 이루나 벼슬을 하지 않는 은거형 선비. 셋째, 벼슬길에 나가서 스스로 학문을 닦아 밝혀낸 도를 실천하는 하는 출사형 선비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마저도 임금과 뜻이 일치하면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만, 만약 뜻을 얻지 못한다면 기꺼이 벼슬을 버리고 물러남에 주저가 없었다. 과연 우리 고장 사람들이 받들어 모신 다섯 분의 선비는 어떤 길을 걸으셨던가?

(3) 다섯 분의 선비
▶ 충암 김정 (1486-1521)
충암은 중종 때에 조광조와 더불어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을 다했던 보은 출신의 대표적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나 9세 때 이미 4서 3경에 능통하였다 한다.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며 개혁정치를 펼쳤으나 중종왕후 신씨 복위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꿈을 접어야 했다. 기묘사화로 중종 15년(1520) 8월에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1521년 사약을 받았다. 36세의 젊은 나이였다.

충암은 유배 중에도 유생들과 교유하면서 ‘한라산기우제문’, ‘수정사중수권문’을 지어 제주도민의 교화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우물을 파서 물이 귀한 백성들에게 사용하게 하였으며, 그가 지은 ‘제주풍토록’은 조선전기 제주의 풍토와 식생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당시의 생활상을 알려주고 있다. 인종 때 복관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보은의 상현서원 외에도 제주 ‘귤림서원’, 청주 ‘신항서원’, 금산 ‘성곡서원’에도 제향 되었다. 귀양 중에도 제주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충암선생을 그들은 제주5현 중의 한 분으로 받들고 있다.

▶ 대곡 성운 (1497-1579) 본보 754호, 755호, (필자블로그) blog.naver.com/imnkw 참조

▶ 동주 성제원 (1506-1559)
선생은 어린시절부터 전국을 방랑하며 벗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세속에 구애됨이 없이 초야에 묻혀 살았다.

15,6세기 네 번의 사화를 거친 많은 선비들이 은거를 택했는데 국가에서는 이들을 유일천거(遺逸薦擧)라는 독특한 제도를 통해 그들을 예우하였다. 성제원 역시 기묘사화 이후 은거하였다가 유일로 천거된 인물이다. 선비의 출사(出仕)는 앞서 말한 대로 그 시대가 왕도를 실현할 만한가, 선비 자신은 그 소임을 다할 만한 자질을 갖추었는가라는 두 가지이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강조한 선생은 만년에 보은현감에 제수 되었다. 현감으로 부임한 그는 3년간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그가 벼슬을 떠날 때 보은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길을 막았다 전해진다.

대곡 성운 선생은 9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주선생은 물론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서경덕 등과 허물없이 지냈다. 남명과 동주의 우정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으나 지면관계상 약한다.

대곡 선생은 가뭄이 들어 임금께 드린 상소에서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해선 수령의 역할이 막중하다며 수령의 최고 이상형으로 성제원같은 인물을 제시한다. 성제원이 인(仁)으로써 백성을 다스린 점과 서원을 건립(상현서원)하여 선비들을 학문에 나가게 한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보은현감 벼슬을 마치고 향리인 공주에 돌아온 선생은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니 후세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처세는 선비의 출사에 대한 자세와 방향에 오래도록 준거가 되었다 한다.

▶ 중봉 조헌 (1544-1592)
나라가 위기를 만나거나 개인으로서 위태로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 의리와 신념을 구현하는데 선비정신이 더욱 빛난다.  공자는 선비의 지조가 위기 속에서 더욱 빛나게 드러나는 것임을 지적하였으니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彫也’ (추운 겨울날 시련 속에서 송백의 푸르른 잎이 돋보인다는 뜻)란 것이다.

조 헌 선생은 조선 왕조 중기의 文臣이며 의병장이다. 24세 때 과거에 급제한 이래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좌랑, 보은 현감, 公州牧교수겸 提督 등을 역임하였다. 보은 현감 재직 시에는 당시 충청도에서 치민제일(治民第一)로 牧民官의 모범으로 평가되었다. 토정 이지함·우계 성혼·율곡 이이에게 수학하였으며, 특히 율곡의 학덕을 배우고 기린다는 뜻으로 후율(後栗)이라 자호(自號)하였으니 보은 수한면 수리티재 아래 그의 호를 딴 ‘後栗司’에서 매 해 그를 기리고 있다.

선생은 16세기 조선사회에 대한 현실 인식과 실천적 학문관을 토대로, 정치·교육·경제·군사에 관한 근본적인 개혁론을 제시하였고 철저한 민생의 안정을 시종일관 주장하였으니, 그의 경세사상(經世思想)과 나아가 실학의 선구적 경향을 고찰할 수 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강직한 상소와 도끼를 들고 올린 지부상소(持斧上疏) 등으로 함경도 길주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왜적의 침입을 예견하고 대비할 방책을 거듭 상소하였다.

그의 예측대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청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5월에 창의(倡義)하여 보은군 수리치재(車嶺)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수차례 의병을 모아 왜적에 항전하였다. 마침내 금산전투에서 자신이 거느린 의병과 영규의 승병을 합쳐 7백 명의 병사로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니 후에 이들 의병이 함께 죽은 자리에 ‘칠백의총’을 세웠다.

이들의 죽음은 ‘義’를 지키다 죽은 것으로 평가되어 ‘義’라 불린다. 이런 순의정신 또한 선비정신과 다름이 아니다.

▶ 우암 송시열 (1607-1689)
한국의 유학자 중에서 우암 송시열만큼 극단적인 애증, 포폄의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송시열에 대해 추앙하는 측은 ‘송자(宋子)’라 부르고, 비난하는 쪽은 ‘송자(宋者)’라 부른다.

전자는 공자.맹자.순자 등에 붙이는 최상급의 경칭이고, 후자는 욕할 때 쓰이는 놈이라는 최하급의 비칭이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이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걸출한 정치인이고 유학자이자 경세가였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호는 尤庵(우암), 본관은 은진이다.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났다.

사계 김장생(충남 연산 거주)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27세(1633년)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것을 모셨으나, 정부가 청나라의 요구에 굴복하여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효종이 북벌계획을 추진하면서 재등용 되어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계획이 중단되었다. 현종은 융숭한 예우로서 중용하려 했지만, 주로 재야에 물러가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도 자문을 우선시 하였다. 정계에서 은퇴하고 화양동에 은거하던 중 장희빈의 아들 균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었으며 사약을 받았다.

송시열의 정치사상은 修己治人(수기치인 : 정치원리), 養民爲主(양민위주 : 정책목표), 禮治主義(예치주의 : 정치이념)로 요약된다.

기존의 양반 지배 체제나 노비제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양반의 특권적 성향은 제한되어야 하고, 노비도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송시열의 문장은 한유·구양수의 문체에 정주의 의리를 지조로 하여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다. 그는 모든 형식의 글에 다 능했으나 특히 묘문 등에 명성이 높았는데, 寧陵誌文(영릉지문)은 최고의 명문으로 평가된다. 그의 글과 글씨는 힘이 넘치는 것으로 평판이 있었다.

그의 사후 신술환국(1694년)으로 무죄가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그 후 전국적으로 70여개소의 서원이 설립되었는데 그를 모신 사액서원만도 37개소나 되었으니 조선 후기 사회에서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서로 『주자대전잡억』외 8종이 있고. 문집으로는 『우암집』『송자대전』이 있다. 보은군 마로면에 있는 ‘고봉정사’ 현판이 그의 글씨이며, 보은읍에 있는 대곡 성운선생 묘갈에 그의 문장이 남아 있다.<끝>
/남광우(보은발전협의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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