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에 살면서도 관선정(觀善亭)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놀라운 일이다. 흔히 보은에서 ‘아흔 아홉 칸 집’이라 불리는 선병국 가옥(중요민속자료134호)은 그 아름다움과 규모로써 보는 이들을 감탄하게 한다. 1919년부터 3년간 돈을 아끼지 않고 지었다 한다. 이 집을 지은 이는 전라남도 보성인 선정훈(宣政薰)이다. 어쩌자고 그 어렵던 일제 치하에서 이다지도 어마어마한 집을 지었을까 하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만 그의 선행은 잡다한 생각을 상쇄한다. 필자는 두 개의 비(碑)에 주목하고자 한다.
솟을대문 앞에 있는 철비(鐵碑)한 점은 이 집안이 전남 보성에서도 큰 부자였으며, 그의 부친인 영홍(永鴻) 公은 당시 그 지방의 생활고로 어려웠던 많은 사람들에게 허기지지 않도록 많은 선행을 베풀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는 전남 보성 지방 4개 면의 소작인들이 그의 공덕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 없어 1922년 보성에 세웠던 시혜비(施惠碑)인데 도로공사로 인하여 2000년도에 이 곳으로 옮겨왔다. 비문에는 그가 논밭을 소작인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세금도 대신 내어주었으며, 수확도 크게 경감하여 어려운 이들에게 배고픔을 모르게 했으니 부자이면서 어진 분이라며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또 하나의 비석 한 점이 왕희지의 필체를 집자하여 세운 ‘관선정기적비(觀善亭紀跡碑)'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 비다. 한옥의 미가 어떻다거나, 연화부수형 풍수가 어떻다거나가 아니다. 장안부대를 이전하고 이곳에다 멋진 관광명소를 조성하면 좋겠다는 바람도 아닌, 진정한 부자의 돈쓰는 법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소위 말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쥬 (註;프랑스어로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라는 뜻. 오늘날까지 유럽 상류층의 정신적 기반이 되어 옴) 이야기다. 돈이면 안 될 것이 없고, 돈이 바로 인격인냥 하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천박함과 일부 졸부들에게 가하는 죽비 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관선정은 이 집을 지은 선정훈공이 세운 개인 서당이다. 그는 1926년부터 44년까지 이 땅의 수 백 명 젊은이들에게 무료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며 좋은 선생을 모셔다가 가르쳤던 것이다. 필자는 젊은 시절 이곳에서 공부한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선생의 삶을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청명 선생은 청산 출생이다. 관선정에서 학문을 익힌 대표적인 학자인 그는 우리나라 금석학의 대가로서 문화재위원장, 성균관 교수로서 한국 한문학의 최고 학자로 평가받는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한학자를 꼽을 때 자타가 공인하는 태두(泰斗)가 청명 임창순이다. 그를 이 시대 지성의 표상으로 삼을 만 한 것은 전통문화를 계승한 한학자라는 이유에서 만은 아니다. 역사적 상황에 직면했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희생하여 민족의 진로를 바로 잡으려는 태도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족'과 ‘사람’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을 실천했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전에 역사학자 이이화(李離和)와 나눈 대화록에 의하면 청명선생은 할아버지가 신식교육을 '짐승을 만드는 교육'이라 하여 금했으므로 집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차츰 집안이 쇄락하였고 앞날을 걱정하던 선생은 마침 관선정에서 한문 공부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한걸음에 달려와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과 시험을 거쳐 스무 살까지 6년을 공부하였다.
관선정에 입교하여 스승 홍치유(洪致裕)선생을 만나게 된다. 관선정에서의 공부는 주로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서 공부를 하였는데 보통 하루에 5,6장의 문장을 배우고 다음 날 선생님 앞에서 외웠고, 문장력 공부를 위해 한문 일기와 작문을 일상화 했다. 당시 학생 수는 15명 내외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미 15세에 가정을 이루었던 청명선생은 가족의 생활고로 인해 6년 만에 관선정을 나와 광부 등의 막노동을 하며 독학으로 학문을 이어나갔다.
마침내 25세에 교사시험에 합격한 선생은 본격적으로 교편을 잡기 시작, 한문학과 금석학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한문학에 있어서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니 젊은 날 관선정에서의 공부가 없었더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당 선생 홍치유는 영남지역의 명문가인 안동의 학봉 김성일 집안의 11대 종손이며 퇴계 이황선생의 학맥을 계승한 김흥락(1827-1899)의 손제자로 알려진 분이다. 오래도록 많은 제자를 두었으나 자신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靑出於藍靑於藍'(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스승보다 나은 제자를 말함)이란 말처럼 자신보다 나은 제자를 키워내려 오롯이 사도의 길을 걸으신 분이 아닐까 한다. 그의 문집 '겸산집' 이 어암리 사시는 김병직님께서 소지하고 있다하나 필자는 아직 접하지 못하였다.
청명 선생은 대학교수 시절인 4.19때는 물론 유신정권 때도 제일 앞장서서 대학교수과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불의에 맞서는 선비적 가치관으로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했다. 서예와 금석학-서지학은 물론 한문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자취를 남긴 그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 것도 민족의 통일 문제였다. 젊은 시절 민족통일에 대한 관심 때문에 교직을 잃었던 사연도 있지만 민족통일은 청명에게는 평생의 화두와 같았다. 그의 말년인 1998년에 통일과 민중운동에 관한 계간지〈통일시론〉을 발간한 것도 민족통일을 자기 삶의 회귀점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글에서 그는 학문을 하는 뜻에 대해 이렇게 썼다.
"조국의 앞날에 대하여는 사람마다 책임이 있다. 〈중용〉에는 학문 하는 사람의 궁극적인 목표가 '힘 있는 실천'에 있다고 가르친다. 배우는 사람은 정확한 역사관을 가지고 모두가 이 땅에 민주주의 터전을 굳건히 다지고 남북의 평화통일을 하루 빨리 앞당기는 역군이 되기를 바란다."
한편, 지난 날 관선정에서 가난한 자신을 거두어 공부시켰던 대로 청명선생도 경기도 충룡산 아래 마석이란 곳에 '지곡서당'이라는 사숙을 열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가며 이 땅에 수많은 한학자를 배출하였을 뿐 만 아니라 청명문화재단을 만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후학을 위해 내놓았다. 그는 한학을 공부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한글전용론을 주장했고, 또한 당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고, 매장도 하지 말고 화장할 것을 당부했다. 지난 1999년 4월 이 세상과의 인연을 다한 청명의 유골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그의 정신이 남아있는 지곡서당 주위에 뿌려졌던 것이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듯한 그의 글씨체와 함께 강렬한 혼을 간직하고 있던 그는 이 시대의 거인이었다. 교육을 받은 것은 유년시절 보은에 있는 서당 관선정에 다닌 것이 전부였지만 한학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삶이다. 관선정에서의 공부가 그의 삶과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리란 건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선정훈가의 사랑채 전면 현판에 '僞善最樂'(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이라는 경구는 소년 임창순선생의 일생을 좌우한 것은 아닐까.... 일제와 미군정, 4·19, 5·16, 5공화국 등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며 한시도 선비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청명선생이 이 시대 우리들에게 던지는 화두가 무엇일지 생각해 볼 일이다.
선정훈공의 후세교육에 대한 집념으로 관선정이 태동했고, 그가 모신 훌륭한 스승 홍치유 선생 아래서 공부했던 임창순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이 땅의 한문학과 아울러 선비의 맥을 이어가게 했으니, 이로써 관선정의 정신은 청명선생의 지곡서당으로 그 뜻이 이어졌던 것이다. 청명선생이 남긴 지곡서당에는 오늘도 학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 옛날 관선정에서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로써 부자 선정훈 공의 미덕이야말로 아흔아홉 칸 이 집의 크기보다 더 칭송하여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4.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다섯 분의 선비 -상현서원편-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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