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은성당 설립 50년사로 본 보은의 천주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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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성당 설립 50년사로 본 보은의 천주교 역사
  • 송진선
  • 승인 2005.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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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1815년, 전후 사정보면 그 이전 입성
송죽공소 보은 대표공소, 남산공소 보은성당으로 승격
마로·삼승 남부권 청산성당 구역, 내북면 미원성당 구역


청주교구로부터 보은성당으로 설정을 받은 지 50년이 되는 지난 1일 보은성당(주임신부 장병철)은 50주년 기념 미사 및 축하 행사를 가졌다.

청주 교구 장봉훈 주교를 비롯해 교구내 각 지역성당 주임신부 및 보은성당 신자와 교적을 보은성당에 뒀던 신자 등 2000여명이 참석해 본당 설정 50주년을 함께 축하했다.

장봉훈 주교의 강론 등으로 이뤄진 감사 미사 후 계속된 축하식에서는 평신도협의회장을 지낸 이흥진 신도와 황영주 신도가 감사패를 받았다.

이어 천주교로 인도된 신입 신자와 그동안 성당 신자로 등록은 되어 있으면서 신앙활동을 하지 않았던 신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교화 활동으로 다시 입교된 신자 등에 대한 봉헌이 있어 번당설정 50주년의 의미를 더욱 깊게 했다.

천주교 청주교구 보은사도의 모후성당은 이번 본당설정 50주년을 맞아‘우리 지역에 구원의 빛을 비춰주시고 당신 사랑 안에 반세기를 살아오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하나이다. 본당 설정 50주년을 맞이해 모든 일에 주님을 으뜸으로 모시는 주님 모시기에 좋은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소서’라는 기도문을 바쳤다.

이날 축하식 후에는 밥, 떡과, 과일 등 푸짐한 음식을 준비하고 또 기념품도 준비해 신자들과 축하식을 함께 한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다.

천주교 입성 110년 이상
보은 지역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기록에 의하면 1815년 순조 15년 을해교란시 보은사람 안치용 외 13명의 천주교인이 청송에서 잡혀 대구감영에 송치돼 사형판결을 받아 옥중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미 그 이전에 천주교인들이 보은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돼 천주교가 보은에 입성한 역사는 적어도 200년에 가까운 역사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보은성당 초대 주임 신부는 기후고 신부를 비롯해 2대 반레문도, 3대 모도마, 4대 윤루치아노 5대 지야고보 신부, 6대 백제랄도 7대 김분도 8대 이 베드로 9대 신순근, 10대 장봉훈, 11대 전명수, 12대 김성규, 13대 김원우, 14대 박기현 15대 김상수 신부를 거쳐 현재 장병철 바오로 신부가 주임신부로 있다.

또 보은본당에서 곽동철 요한 신부(옥천성당)와 윤기국 요한 신부(미국), 곽석희 미카엘 신부(캄보디아)를 배출했고 본당 출신 수녀도 강태임 수녀를 비롯해 10명을 배출했다.

평신도사도직협의회장은 1955년10월1일부터 1971년까지 회장을 지낸 초대 김경옥회장이 교세 확장과 착근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2대 원재순, 방영구, 김용석, 김홍균, 강태준, 이흥진, 이윤섭, 이흥진, 최영근회장을 거쳐 현재 11대 이종성씨가 회장을 맡고있다.

보은성당 관할구역은 보은군내 전역으로 하고 있지만 마로면의 세중, 한중, 변둔, 갈전, 원정리는 청산성당 구역이며 삼승면 달산, 우진, 송죽, 선곡, 둔덕만 보은 본당 구역이며 나머지 지역은 청산 구역이며 내북면은 모두 미원성당 구역으로 돼 있다.

신도수는 본당 설립시 460명에서 출발, 증가세를 보이다 1971년 900명, 72년 684명까지 감소했다가 지난해 2318명으로 늘어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죽·분저실 공소 보은군 대표
1851년 보은 멍에목에 교우촌이 형성돼 전교활동을 벌인 기록이 있는 가운데 1893년부터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공소시대가 열린다. 1955년 보은본당 설립전 보은은 당시 장호원(현 감곡)본당 신부관할이었으며 1897년∼1900년까지 당시 공소는 보은 선내실(17명), 보은 하가습(18명), 보은 황토말(9명), 회인 아치실(5명)에서 1900년∼1901년에는 회인 아치실(15명), 회인 말미(74명)였다.

이후 1903∼1904년에 보은(14명), 회인 아치실(15명), 회인 말미(93명)으로 공소수와 신자수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옥천본당이 설립된 1910년 보은은 감곡에서 옥천으로 이관됐는데 1910∼1911년 당시 보은의 공소는 회인 분저실(59명), 회인 법주리(20명), 보은 잣고개(30명), 보은 가섭(22명)인 것으로 돼 있다. 1917년∼1918년에는 보은 백현 36명, 보은분저곡 101명까지 늘어났다.

옥천본당이 폐지되고는 1919년 대전본당에 편입됐는데 1919∼1920년 보은 분저곡(74명), 보은 백현(32명)이었으며 당시 송죽공소는 대전이 아닌 청주본당에 편입되었다. 1920∼1224년까지 대전본당 시대에는 분저리 공소만 유지돼 신자수가 58명에서 38명, 24명으로 감소했다.

옥천본당 소속인 보은지역의 교세가 통계로 정확하게 나온 것은 1909년∼1910년 보고서에 의해서이지만 옥천 본당이 설립되기 훨씬 전부터 보은지역에서 천주교가 전래된 것으로 신자들의 증언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1886년6월 한불조약 체결로 신앙의 자유를 찾은 경상도 북부지방에 숨어 있던 천주교 신자들이 보은으로 이주해와 옹기를 굽고 토굴생활을 하며 정착했는데 삼승면 구점(현 송죽 공소)와 회남 분저실 공소가 보은군내 대표공소이다.

보은읍 죽전리 남산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
1898년 광무 2년에 송죽리에서 옹기공장을 운영했던 정학서와 옹기점을 운영했던 김순배, 사립학교를 운영했던 황토말 기만동이 정학서의 집에 공소를 차리고 미사를 드린 것이다.

이 송죽 공소는 교세가 확장되고 하개 공소 개설을 후원하는 등 당시 지역에서는 가장 큰 공소였다. 보은읍에 공소가 없었던 당시 교세가 큰 송죽공소와 보은읍에 살고 있는 교인들의 도움으로 1952년 보은읍 죽전리 남산에 보은공소가 설립된다.

부지는 지금 충혼탑 올라가다 오른쪽에 있는 주차공간이 있는 공터로 김중배씨가 5000여평의 부지를 제공했고 김춘만씨가 3만환에 상당하는 종을 기증하고 기와는 박기종씨가 기증했다는 것이 경향잡지에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각 공소의 신자들의 헌금과 노력 봉사로 6개월에 걸쳐 보은 공소(남산)를 신축한 것이다. 공소까지 생기자 교세 확장이 가일층 진척돼 마침내 1955년 10월1일 보은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고 미국인인 기후근 신부가 초대 신부로 부임했다.

사제관은 구 보은면사무소 앞 현 보은신협 건물에 있었으며 또 보은읍 삼산리 174-8번지 현 성당은 1956년 3월 기후근 신부 재임시 보은향교재단에서 대지를 구입해 1966년 11월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해 1956년12월25일 성탄미사부터 드릴 수 있었으며 현재 본당으로 활용하고 있는 성당은 1966년 11월 독일풍으로 신축한 것이다.

1957년 성모의원을 개원했고 동정성모회 분원이 설치됐으며 1972년 성모유치원이 개원했고 2002년 노후된 교육관과 사제관을 헐고 개축했으며 2005년에는 수녀원을 신축했다.

군내 공소의 역사
송죽공소는 1898년 교우촌이 형성된 후 1903년 개인 집에 공소를 차린 군내 가장 오래된 공소이다. 보은본당 설립 전 송죽공소는 옥천성당 관할이었으나 1955년 보은성당 설립 후 보은성당 관할로 편입됐으며 1959년 9월 옥천 청산 본당 설립으로 송죽 공소를 중심으로 남부와 원남 지역이 청산 본당 관할 구역으로 편입됐다.

강태경씨가 회장이고 144명의 교적을 갖고있는 송죽 공소는 매주 공소예절을 올리고 있으며 매월 1회식 신부님이 공소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회인공소는 미사를 집전했던 송평공소가 1958년 옹기점 폐쇄 후 없어지는 바람에 1957년 30명의 교인이 전교활동을 하기 시작한 후 1963년 회북면 중앙리 17-3번지에 대지 134평을 구입해 공소를 건립한 것이 회인공소이다.

그러다 1980년 홍수로 유실됐고 신자들도 뿔뿔이 흩어져 신도회장 집에서 교리 교육을 받는 등 교세가 약해졌었다.

이후 신도들이 홍수로 유실됐었던 공소가 있던 자리에 1992년 공소 경당을 건립했으며 현재 정교철씨가 신도회장을 맡고있으며 136명의 신도가 교적을 두고 있다.

속리공소는 전신인 1906년 옥천본당 산하 백현 공소와 상판공소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백현공소는 당시 33명의 신자가 있었으나 신자들의 전출로 공소 운영이 어려워 1960년경 폐쇄했고 상판공소는 1967년 폐쇄했다.

이후 1975년 속리산 일대 신자들과 공소 설립에 대한 대화가 오갔고 1979년 8월 상판공소를 매각한 대금으로 현 공소터를 매입해 전교활동을 벌였으나 1980년 수해로 유실됐고 다시 현 위치에 건평 20평 규모로 공소를 재건립했다. 윤명섭씨가 화장인 속리공소는 172명의 신자가 전교활동을 하고 있다.

관기공소는 1964년 10월 관기리 347-5번지에 공소를 설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탄부 덕동 지역은 양반, 상놈 신분 구별로 전교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제대를 가지고 가정집에서 주일 공소를 하며 전교한 결과 430여명으로 교세가 확장돼 공소까지 건립된 것.

초기공소에서 사용한 제대는 세중공소에서 가져온 것이었으나 지금은 보은성당에서 사용하던 제대로 교체했다. 현재 관기공소는 강을종씨가 회장으로 있으며 신자수는 173명이다.

세중공소는 관기공소보다 먼저 설립됐는데 1958년 보은읍 남산에 있던 보은공소 건물을 철거한 건축 자재를 그대로 활용해 신축했다. 공소 신자 15명이 매일 봉사해 남산 공소형태의 모습으로 신축했으며 1964년 청산본당으로 편입됐다.

백석공소는 전교활동으로 신자가 늘어나 1963년 공소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돼 174평의 부지에 9.5평 규모의 공소경당을 건립했다. 공소부지는 이규선씨가 희사했고 건물 벽은 흙장을 직접 찍어 건축했고 1985년 보은 가톨릭의사회 후원으로 산외면 백석리 444-1번지에 개축돼 활기를 띠기도 했지만 현재는 공소가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장갑공소가 먼저 생겼는데 1904년부터 전교활동이 퍼져 1955년 보은본당 설정 이전에 미사를 집전할 정도로 활기가 있었으나 1991년 장갑공소에서 장갑구역으로 격하됐다. 이에 따라 백석공소와 장갑공소는 본당에서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있으며 신일수씨가 회장이며 신도수는 양 공소를 합해 120명이다.

하개공소는 1939년 송죽공소 2대회장이었던 김순배씨와 하개리에서 옹기점을 운영했던 노명준씨가 하개 공소를 개설해 전교활동을 시작했다. 하개 공소는 외속 서원 안도리에 있었으나 1961년 장내리로 이전 건립됐으며 현재는 인구감소로 현재는 공소운영이 안되고 있다. 현재는 매주 본당에서 미사에 참례하고 있고 회장은 공석이며 교적에 등재돼 있는 신자수는 54명이다.
정리 :송진선 기자
도움 : 한상일 (보은성당 50주년 기념 사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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