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곡리 문화유적
상태바
종곡리 문화유적
  • 보은신문
  • 승인 2005.09.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비의 숨결, 보은읍 종곡마을을 찾아서....(2) 
3. 대곡 성운 선생과 백호 임제

대곡 성운(1497-1579)의 자는 건숙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깊고 깔끔하였다. 공부에 힘써 나이30세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1545년 그의 형 우(遇)가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이때부터 자취를 감추고 보은 속리산 자락 종곡리에 은거하였다. 그 뒤 명종때에는 여섯 가지 행실(효도,우애,일가에게 잘하기,연비친척과 잘지내기,신의지키기,남을 동정하기)이 잘 갖추어졌다 하여 서열을 뛰어넘는 높은 벼슬을 하사하였으니 융성하게 대우하기가 삼정승보다 나았으나 끝내 임금을 대하지 않았다 한다. 선생은 시문에 능하였으며 은둔과 불교적 취향을 드러낸 시를 많이 남겼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화담 서경덕이나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등과 교유하며, 높은 학문을 지닌 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선조 임금이 제문을 내려 애도 하였으며, 뒤에는 승지로 추증되었다. 당시 지리산 아래 南溟이 있고, 청량산 기슭에 退溪가 있었다면 속리산에는 大谷이 있었다고 일컬어진다.

선생의 성정은 산수를 좋아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회포를 담아 시를 읊조렸고, 읊기를 마치면 반드시 술을 따라 두세 순배 돌려 술기운이 약간 돌면 그치고 즐거워하면서 근심을 잊고 늙어가는 줄도 모르는 도인 이었다고 전한다. 때때로 좋은 때가 되면 소를 타고 유유자적하기도 했으며, 평생 남의 잘못을 말한 적도 없었으며 거문고를 뜯고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즐긴 80여년의 생애였던 것이다.

대곡은 임제가 유일하게 무릎을 꿇고 조아리던, 마음으로 열복하던 스승이었다. 대곡은 법도 밖을 바람처럼 치달렸던 백호의 기개를 모두 포용하여 고요하게 진정시켰던 큰 골짜기(大谷)였던 것이다. 대곡이 죽은 뒤 임제 역시도 벼슬에 마음을 끊었다 한다. 그는 짧은 옷을 즐겨 입고 시와 거문고를 벗 삼아 그를 찾아온 당대의 석학들인 화담 서경덕과 교유하였고,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등에게 성리학을 강하였다. 백호 임제도 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선생이 백호와 처음 대면 때 반성문을 써보라 했다. 이에 백호는 意馬賦(뜻이 정립되지 못하고 달리는 말과 같이 호협하게 방랑한다는 뜻)라는 시를 지었는데 성운은 훗날 그의 문집 "대곡집"에서 백호에 대하여 "소년 때 착실히 공부하였고 시를 지으매 땅에 떨어지면 쇠 소리가 나더라. 이별한 후로도 서로 대면함과 같으니 좋은 밤 밝은 달이 마음속에 이르는 것 같다"고 적었다.

少年誰氏子 젊은이는 뉘 집의 자제인가
詩似李將軍 시가 흡사 이 장군 같구나
何日重相見 어느 날 다시 만나 볼까하여
徒勞望北雲 부질없이 북쪽 가는 구름만 보네.

이 시의 제목은 "醉贈林秀才" 라는 시인데, 젊은 임제를 만난 대곡 선생이 그에게 내려준 시로써 그의 문집인 [大谷集] 上卷에 나온다. 어린 임제의 천재성을 단박에 알아본 대곡선생이 써준 이 시를 성인이 된 백호는 잊지 못한다.
대곡 선생은 을사사화 당시 많은 선비들이 목숨을 잃은 것을 애도 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波乾龍爛死 물이 말라 용은 타서 죽었고
松倒鶴驚飛 소나무 쓰러지자 학들도 놀라 가 버렸네.

선생 또한 속리산 자락인 이곳 북실에 몸을 숨긴 뒤 거문고를 타고 글을 읽으며 신선의 삶을 표방하였지만 어찌하여 세상에 대한 울분과 근심이 마음 속 깊이 없을 수 있으랴!
은자의 고뇌를 암시하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傍人佇見關門臥 사람들은 문 닫아걸고 누운것만 보고는
錯道能忘世上名 세상의 이름 잊었다 잘 못 말하는구려

그러나 언제나 마음은 자연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시골생활의 만족이었다. 그런 생활의 한 담면을 볼 수 있는 시조가 전한다.

전원(田園)에 봄이 오니 이 몸이 일이 하다
꽃 남긴 뉘 옮기며 약밭은 언제 갈리
아이야 대 베어 오너라 삿갓 먼저 결으리라

오랜 동면에서 만물이 깨어나는 봄이 오니 할 일이 많구나. 꽃나무는 누가 옮기고 약초밭은 언제 갈 것인가. 대나무 삿갓을 결어서 쓰고 들로 나가려는 시골생활의 활력과 즐거움이 넘치는 시이다.

대곡선생을 평생의 유일한 스승으로 모신 임제에 대한 그의 호방한 성격이 잘 묻어나는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 워낙에 술을 좋아하던 백호가 밤새 술을 마시고 말을 탔다. 시중드는 하인이 "대감님, 취하셨나 봅니다. 신발이 한쪽은 가죽신이고, 한쪽은 짚신이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임제는 "길 오른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가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왼편에서 보는 사람은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그게 무슨 탈이냐?"라고 꾸짖었다니 그의 호협하고 해학적인 면을 단적으로 나타낸 일화라 생각된다. 그가 스승이신 대곡선생께 바친 제문이 있으니 우리는 백호의 글을 통하여 대곡선생의 풍모를 조금이나마 마음에 그리고자 한다.

祭大谷先生文
일부러 세상을 피해 살거나 기이한 행동 하는 것을 성인(聖人)은 하지 않습니다.
제 자랑을 하거나 자기를 추천하는 것을 군자(君子)는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옛부터 선비들이 이런 두 가지 폐해에 흘러들었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직 백이의 청렴, 유하혜의 온화함을 갖추어 옥처럼 빛나고 금처럼 고우시며,
기러기 먼 하늘 날고 봉이 천길 오르듯 뜻이 높은 경우는
저는 스승에게서만 보았을 뿐 입이다.

스승께선 소부와 허유보다 절개가 높았지만 세상이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승 또한 알려지길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알려지길 구하기보다 혹 세상에 알려질까 오히려 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산림에서 좌우에 거문고와 서책을 두고 조촐하게 사신지 50년.
만약 세상의 이름이나 도둑질하는 변변치 못한 인사들과 비교해 말한다면, 매화가 보통 꽃보다 빼어나고, 학이 닭의 무리에서 특출 난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공자가 "세상을 피해 있어도 근심하지 않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던 바 스승은 이 말과 꼭 같은 분이십니다.

다만 생각해보면 지금은 말세같이 혼란스러워 시비를 가리는 기준이 잘못되어 있어 약초와 독초가 구분되지 않고, 선과 악이 뒤섞인 지 오래되었습니다.
훗날의 역사가 高士傳을 엮으면서 산림처사를 가장하고 벼슬을 구한 이들과 스승님을 같이 다룬다면 아, 이 어찌 한숨이 나오고 가슴이 메어지지 않을 수 있으리까!

아, 슬픈 일입니다!
못난 여인네도 누가 돌봐주면 아름답게 가꾸게 됩니다.
또한 저 같은 볼품없는 거친 사람도 여러 차례 스승의 안목을 더렵혔음에도
언제나 스승은 저를 범상치 않은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스승을 높이 격앙하면서도 은혜를 갚을 길 없어서 이렇게 위태로이 반평생을 살면서 마음 편치 못한 까닭입니다.

지난 번 스승의 부음을 들었을 때 멀리 변방에 있어 뵙지 못해 간장이 찢어지고 눈물이 비오 듯 하였습니다. 그 애도의 정이 노래가 되어 새로운 곡조가 되었습니다.
작은 벼슬에 있으며 관명을 어길 수 없어 천리를 달려와 조문하지 못하였는데, 마침 그 때에도 서울에서 온 편지가 29일 장례를 치를 것이라 잘못 알려왔으나 잘 알려왔어도 만사를 폐하고 명정을 쫓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가만히 초심으로 생각해 보건데 생사간 은혜를 저버림이 부끄럽습니다.
하여 변방에서 하늘에 사무치게 소리 높여 통곡합니다.

아, 슬픕니다! 北雲에 취한 노래로 반갑게 맞아주심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밝은 달처럼 맑은 시는 영결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상 아래에서 다시 절 올릴 일도 없어졌으며, 숲 속에서 마음을 주고받을 일도 다시 찾을 길 없게 되었습니다.
우주는 적막하고 긴 밤은 침침하니, 이후로는 제 마음 알아줄 이 없습니다.
흠향하소서!

 *북운에 취한 노래 ; 대곡이 임제에게 준 시의 마지막 구절 참조

임제는 스승 성운이 세상을 떠난 8년후 知己가 끊어지고 방황하다가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나이 39세 였는데 "사해제국이 모두 황제가 되어 세상을 호령했는데 우리나라만 못 해보니 한이 되는데 더이상 나의 죽음을 슬퍼울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4. 글을 마치며
여행 예찬론자들은 여행을 하며 세 가지를 만난다고 한다. 새로운 풍경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을 만난다는 것이다. 이 기회에 필자는 우리고장 보은이 충암 김정 선생을 비롯하여 병암 구수복 선생, 그리고 대곡선생과 같은 조선 최고의 선비가 태어나고 사셨던, 그리하여 16세기 중반 조선조의 학문과 시대정신이 이곳 보은에서 꽃피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들 선비의 의리정신은 문하의 제자들을 통하여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기와 구한말에 있어서 의병활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필자의 과문함이 선현들의 고귀한 정신세계를 왜곡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복된 마을 북실(종곡)이 충과 효, 유교의 아름다운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된 마을로 발전하길 바라는 바다. 이번 일정에 동행해주신 필자의 스승같은 벗 -옛말에 이르길 좋은 친구란 스승과 같으며, 참된 스승은 벗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최규인(삼년산향토사연구회장),정창원님(보은농협지점장)께 더불어 감사드린다.
남 광 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