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인현의 자존심으로 남아있는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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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인현의 자존심으로 남아있는 유적지
  • 송진선
  • 승인 2005.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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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문화기행 … 회인현 문화유적 인산객사 · 풍림정사·오장환 생가터
매월 둘째 주 일요일에는 문화기행을 한다. 이번 8월의 문화기행은 회북면 내 유적지를 탐방하는 것으로 계획했는데 8월 첫째주 본보의 휴간으로 인해 8월 문화기행 안내를 제대로 홍보하지 못했다. 매번 문화기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지역에 소재한 것인데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정 문화재이든, 비지정이든 마찬가지였다. 가슴 절절이 와 닿는 그 무엇을 찾기보다는 또 한번의 기행을 마무리했다는 숙제를 해결한 학생의 마음이 컸다는 자아 비판을 먼저 독자들에게 고백한다.

글을 쓰는 일 , 또 알고 써야 제대로 전달이 되는 소위 기자라는 사람이 이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 우리 지역에 소재한 문화유적지를 어느 정도 찾아보고 아니 책에서라도 어느 정도 읽어보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한심함을 생각하면서 지난 14일 회북면으로 향했다.

이번 기행지인 회북면에 소재한 인산객사와 풍림정사, 그리고 근대시문학의 거성으로 새롭게 추앙 받는 오장환 생가 터를 차례로 찾았다.

혼란기 자신이 갖고 있는 사상에 따라 월북을 단행했고 수 십년 동안 문단의 큰 획을 그은 작품들이 어둠의 자식들로 감춰져 있다가 다시 빛을 보고 있는 오장환 시인을 생각해보았다. 광복절. 남북 화해 무드가 고조되고 남쪽의 작가들이 북쪽의 평양을 방문하는 세상이 된 지금, 모두가 회인현의 유서 깊은 역사를 읽어낼 수 있는 유적지였다.

# 인산객사, 객사 역할 톡톡
회북면 중앙리에 위치한 회인 인산객사는 한창 보수 중이었다.
충북 지방 유형문화재 제 116호인 인산객사는 추녀, 서까래 등 썩은 부분을 보수하고 삼문도 보수를 하고 있었다.
나무냄새 솔솔 나는 새 것으로 서까래를 교체하고 추녀도 교체하고 황토 흙을 처바르는 등 분단장이 한창인 인산객사는 한 때 회인현의 동헌으로 전해져 오다가 1983년 해체 보수 때 대들보 아래의 묵서명(墨書銘 : 먹으로 글씨를 새긴 것)에 조선 효종 6년인 1655년에 중건하고 순조3년인 1803년에 중수한 기록과 함께 인산객사(仁山客舍)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로써 그동안 동헌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 밝혀 진 것이다.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로 객관이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배례하는 한편 여행하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전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 패(稗)로 전(殿)자(字)를 새겨 각 지방의 객사(客舍)에 두고 정조(正朝)·동지(冬至)·탄일(誕日) 등에 외방에 나가 있는 중앙 관리나 지방 수령이 이곳에서 임금에게 예를 올렸다.

객사의 건물은 흔히 대청마루와 같은 의미의 대청인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翼室), 즉 대청 좌우에 방을 두고 앞면에 중문, 외문, 옆면에 무랑(無廊 : 행랑)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인산객사는 정당과 외문만이 남아있고 현재 보수를 하고 있는 것도 정당과 외문이다.

건물 설계 면으로 볼 때 인산객사는 자연석의 얕은 기단 위에 8칸에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으로 정당을 세우고 서까래를 받는 처마의 도리가 둥근 모양인 굴도리 5량(五樑: 들보가 5개인 것) 구조의 홑 처마 익공계 건물로 기둥은 원주이다.

또 건물 가운데 3칸은 우물 마루를 짜고 좌·우 2칸에 익실을 두고 가운데 마루와 연결시키고 있는데 조선 후기의 객사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건물이다.

인산객사는 일제때에는 보통학교로 사용되다 면사무소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후에는 예비군 중대본부로 사용되는 등 객사노릇을 톡톡히 했다.

지금은 다른 용도로 전용되지 않고 문화재로서의 위엄을 지키고 있지만 정당과 앞면에 중문·외문을 갖추고 옆면에 무랑을 갖추고 있는 것이 보통의 객사 구조인 것으로 볼 때 현재 정당과 외문만 남아 있는 회인 인산객사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복원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학문을 강하던 풍림정사 이젠 적막
정사는 학문을 논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강당으로 충북도 지정 지방 기념물 제 28호인 풍림정사는 조선말기의 성리학자로 보은이 낳은 대표적 사상가인 호산 박문호 선생이 창건해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회북면에서 회남면 방향의 눌곡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이곳 출신인 박문호 선생이 낙향하여 고종 26년인 1889년 창건하고 1980년 중창한 건물로 목조 기와집으로 전면 6칸반,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이다.

우측 1칸은 부엌이고 2칸은 온돌방이며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고 2칸은 강당구조로 우물 정(井)의 마루를 깔았다. 이 건물의 이름인 풍림정사란 편액은 1848년(헌종 14) 문과에 급제, 대사헌·좌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이 되고, 1882년(고종 19) 좌의정이 되었으나 조미수호조약 등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사임했던 입재 송근수의 글씨이다.

이외에 풍림정사기, 풍림강업서, 여담간명서 등의 현판과 주자의 연비어약 글씨 현판이 소장돼 있다. 또한 호산의 문집인 호산집의 사각(私刻) 판본(板本)과 가로 1㎝, 세로 1㎝, 두께 0.5㎝의 나무활자 일부가 남아있다.

풍림정사 뒤편에는 1906년에 건립된 후성영당(後聖影堂)이 있는데 주희, 이이, 송시열, 한원진의 모사 본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다 1921년 박문호 선생의 영정을 추가 봉안했는데 박문호 영정은 박문호가 64세 때인 1912년에 찍은 사진을 이춘화가 보고 그린 것이라고 한다. 매년 봄이면 회인의 유림 및 영해박씨 종중 등이 참석해 후성영당에 모신 분들에 대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풍림정사를 찾았을 때 가정 먼저 맞는 것은 아름드리 은행나무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드리인 은행나무에 매년 많은 양의 은행이 달려 풍요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의 것인지 바닥에는 미처 수확을 하지 못해 떨어져 버려 씩은 묵은 은행들이 쌓여 있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노화 탓인지 뿌리에서 가지 끝까지 영양분이 제대로 순환되지 않아 상층부는 이미 가지가 죽고 있다.

정사를 창건했을 때 학문을 논하는 장소로 많은 성리학자들의 발길이 잦았고 후학들을 길러내 많은 박문호 선생의 사상을 배우려는 선비들이 몰려들어 하루 종일 글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풍림정사는 그곳에 모셔져 있는 분들을 위해 제향을 올리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

사용하지 않으면 집은 금방 무너진다는 말과 같이 사람의 훈기가 스러져 가는 집도 지탱해준다. 자물쇠로 닫아놓고 출입을 막을 것이 아니라 여름철 회인향교에서 주관하는 한자교실 등을 수학하는 등의 본래 강당으로 되살릴 방법은 없을까.

# 근대 시문학계를 평정한 시성으로 평가받는오장환
오장환 이름만 거론해도 ‘빨갱이’로 몰렸던 시절, 해금이 된 후인 시간이 많이 흐른 1996년에도 지역 주민들은 ‘빨갱이’라는 적대감으로 문학적으로 시성인 그를 대접을 하지 않았다.

1996년 생가터에 세울 계획이었던 표지석을 주민들의 반대로 회북면사무소 마당에 세울 수밖에 없었고 2년 후에야 겨우 생가터 앞에 자리하게 되었다. 중앙리 출신이지만 그 정도로 거명하기 조차 힘들었던 오장환 시인을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이제는 ‘빨갱이’에 대한 인식은 없고 우리동네에서 태어난 큰 시인이라는 인식만 자리잡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오장환 시인이 월북한 시인이라는 것은 녹고 인간, 시인으로서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보은군이 추진하는 오장환 시인 문학공원 조성만 해도 알 수 있다. 보은군이 부지매입비 등 총 16억원을 투입해 추진하는 오장환 생가복원 및 문학공원 조성 사업은 1700여평의 부지에 돌담 정비, 우물 등 옛 모습을 최대한 살리는 생가복원 사업과 전시실과 세미나 실을 갖춰 시인의 작품과 사진 등 유품을 전시하는 문학관이 들어선다.

현재 부지 중 1필지를 매입하지 못한 상태이며 매입한 건물을 부수는 공사에 착수했다. 향수시인 옥천의 정지용을 능가하는 시성으로 평가받는 오장환의 생가가 복원되고 문학공원이 조성되면 정지용 시인과 연계한 문학탐방코스로 각광받을 것에 대한 기대도 크다.

1918년 회북면 중앙리에서 태어나 6살에 회인 공립 보통학교를 입학 재학 중 1927년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가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회인에서 보낸 시인 오장환의 작품에는 이곳에서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있다고 한다.

따라서 풀이 무성한 생가를 보며 이러다간 남아있는 생가의 원형마저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면서 오장환 시인이 문학공원은 천편일률적인 생가복원이나 문학공원이 아닌 시인이 가진 이미지, 작품의 대표적 이미지를 형상화 한 건물양식, 시비를 건립하는 등 생동감 있는 문학공원, 문학관이 건립되길 바랬다.

또 지역 주민들도 정겨움을 주는 돌담이나 감나무 등을 더 이상 훼손하지 말고 잘 가꾸어 이 곳을 찾는 문인들에게 시인의 고향다운 인상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을 주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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