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리(壯材里)는 고유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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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리(壯材里)는 고유 지명이다
  • 보은신문
  • 승인 2005.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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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지난 8월 2일 도내에서 발행하는 지방지 모두에 법주사가 ‘역사 바로 잡기에’ 나섰다는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대한불교조계종 5교구 본사인 법주사에서 외속리면 장재리를 ‘행궁리’또는 ‘대궐터’로 지명을 변경하고 행궁리를 사적지로 지정하고 행궁을 복원해달라는 건의문을 보은군에 제출하였는데 건의문에 따르면 ‘대궐터’가 속한 마을이름이 장재리로 되어있는 것은 일본의 잔재로 장재리는 본래의 이름인 ‘행궁리’또는 ‘궐터’로 변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주사는 건의문과 함께 세조실록에 ‘세조대왕속리산 ·복천사행행기’‘복천보장어제휴기’‘효령대군청권집유’를 참고 재료로 제출하였다는 기사였다.

이어 보은신문 제748호(2005. 7. 29)의 기사 내용도 주목되는 기사였다.
동 신문 2쪽에는 법주사 건의 내용을 크게 다루고 그 아래에 ‘마을이름도 바꿔달라 여론’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내용인즉 보은신문 주최로 면 명칭변경을 위한 여론수렴과정에서 제기된 것으로 요약하면 외속리면은 ‘장안면’으로 변경하되 한문 표기는 ‘長安面’이라고 바꿔야하며 일제 때 엉뚱하게 바뀐 황곡리(荒谷里)를 ‘黃谷’또는‘凰谷’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애용이고 6쪽에는 주민들과의 간담회 내용이 소상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지명이란 오랜 역사와 전통이 밑바탕 되고 조상들의 슬기가 숨쉬고 있어 함부로 바꿔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제 문제된 지명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장재리는 일제 잔재가 아니다
외속리면 장재리는 ‘독점’·‘장자불’‘대궐터’마을을 합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표씨(表氏)성을 가진 사람이 이 곳에서 독을 구어 팔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음으로 이웃에서 ‘표장자(表長者)’라 부르고 독을 만들던 곳을 ‘독점’이라고 부르고 표장자의 아들이 커서 살림을 차리게 되어 표장자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니 사람들이 ‘장자울’또는 ‘장자불(長子洞, 壯者洞, 壯才 등으로 표기하였음)’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의 ‘대궐터’는 세조 대왕이 속리산 복천사에 있던 신미(信眉)대사를 찾아오실 때 행궁(行宮)을 지었다는 곳이다. 행궁이란 임금이 거동할 때 묵던 별궁으로 지을 때 백성이 살지 않거나 살았다면 철거되었을 것임으로 그 곳에는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궐터 마을 뒷산에는 추계추씨(秋溪秋氏) 선대의 묘소가 집단적으로 여러 기가 있어 이 마을이 추씨들에 의하여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은군지입향편에 보면 추세현(秋世玄)이라는 이가 숙종 때 청주 이상면(二上面)에서 이 곳에 와서 살았다고 기록되었다. 따라서 대궐터는 행궁을 세운 200여년후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장재리에는 행궁을 짓고 세조가 하루를 묵어 가셨을 때 관련하여 부르게 된 지명이 여러 곳 있고 행궁의 주춧돌이 남아 있으나 법주사에서 제출하였다는 참고자료를 필자는 보지 못하였으나 자료에 행궁과 관련된 기록 외 마을 이름을 ‘행궁리’또는 ‘대궐터’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가? 법주사는 개명을 요구하기 전에 이 기록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군 역대 지리지 방리(坊里)조에는 장재리와 행궁리는 기록이 없다. 다만 1895년(고종32년)에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 보은군편’과 1899년(고종광무3)에 편찬된 ‘충청북도보은군읍지(忠淸北道報恩郡邑誌)’에 장재리(壯才里)가 기록되어 있다. 두 읍지에도 방리조에는 기록이 없으나 사창(社倉)조에 기록하고 있다.

사창이란 빈민 구제를 위하여 가을 추수기에 걷어들여 보관하였다가 춘궁기에 대여할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로 보은군내에 11개소가 있는데 토굴 형식으로 만들었고 있는 장소를 보면 방리조에 없던 ‘산외(山外면 : 방리조에는 外北面)면’과 ‘산내면(山內面)’기록이 있어 1894년 갑오경장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속리면 장재리가 기록되었다. ‘장재리 사창은 4칸으로 235석을 보관한다’고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장재리는 법주사에서 주장하는 행궁리 또는 대궐터를 일제가 장재리로 고친 것이 아니라 ‘장자불’의 한문 표기의 하나였던 ‘壯才’의 우리 고유지명인 것이다.

3. 장안의 한문 표기는 帳內이다.
장안(長安)은 지금의 중국 서안(西安)의 옛 이름으로 호경(鎬京)이라고도 하여 멀리 주(周)나라로부터 당(唐)에 이르기까지 육 대 천여 년간의 도읍지로 당나라 전성기에는 인구가 100만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장안은 동양에서는 수도를 상징하게 되고 지금 평양의 옛 이름이기도 하였다.

보은신문 기사에 따르면 ‘외속리면’을 ‘장안면’으로 장내리는 장안리로 개명하자는 뜻은 장내리를 장안이라 부르는데 그 장안을 중국의 長安과 같은 뜻으로 보고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안’이란 장내리의 마을 이름이 생긴 내용을 전혀 도외시한 발상인 것이다.
‘장안’이란 마장 안쪽에 있다하여 얻은 이름으로 한문으로 ‘場內’라 하는 것이 옳은 표기임에도 ‘帳內’라 표기하였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마장이란 말을 매어 두거나 놓아기르는 곳을 말한다. 그렇다면 기르는 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시설이 필요한 것이다. 울타리든 가마니 또는 천 등으로 막아 놓아야 한다.

그런 시설을 하여 놓았기 때문에 장막(帳幕) 안쪽이라 하여 장안’이라 하여하였던 것이며 표기를 帳內라 한 것이다. 따라서 장내리의 우리 이름인 ‘장안’은 수도를 상징하는 長安하고는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

혹자는 동학교도들의 취회 때 ‘서울 장안이 장안이냐? 보은 장안이 장안이지’라는 민초들의 노래 말을 들어 장안을 長安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그 노래를 국, 한문으로 병기하면 “서울 장안이 長安이냐? 報恩 장안이 長安이지”라고 써야 맞는 것으로 장안의 옳은 표기는 帳內이며 모든 기록은 帳內로 기록하고 있다. 동학 측 기록인 ‘해월신사실사(海月神師實史)’에도 ‘삼월에 신사가 청산에 오시어 대선사(大先師:최재우)의 제사를 차릴 때 이때 참석한 사람은 손병희, 이관영 등 여러 사람이었다. 제사를 마치고 여러 사람이 신사에게 건의하기를 先師의 원통함을 풀어드리지 못하였는데 도인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원하건데 선생은 도인을 보호할 수 있는 방책을 지시하여 주소서’하니 신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금 ‘장내로 가니 그대들은 각지에 공문을 보내 팔도의 도인들이 일제히 장내에 모이게 하라’ 11일 신사 장내에 돌아오니 모인 사람이 수만이 이르렀다로 모두가 帳內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영조 때인 1757년부터 1765년까지에 편찬된 여지도서 방리조에 帳內里는 ‘장내리: 관문에서 동쪽 15리 거리에 있으며 42호에 남자 82명, 여자 87명으로 편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장안면 장안리로 고치더라도 長安面 長安里로 표기하여서는 아니되며 순수하게 한글로 표기하여야 맞는 것이다.

4. 황곡리는 거치실이다.
마을 앞들이 가을이면 황금들녘이 된다하여 붙여진 黃谷里가 일제에 의하여 엉뚱하게 인심이 사낮다는 의미의 荒谷으로 바뀌였다고 하는가하면 봉황새가 梧林에 살면서 낮에는 빙경산에서 놀았다는 전설에 따라 鳳飛里(봉비리)와 연관하여 凰谷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기사도 있었다.

황곡리는 옛날부터 우리말로 ‘거치실’이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거치실’은 ‘북실(種谷)’·‘선우실(仙谷)’·‘노루실(獐俗)’·‘쇠실(求仁의 松)谷)’·‘새실(鳳谿)’·‘임실(壬谷)’·‘부내실(北岩)’·‘방아실(水門)’·‘띠실(梅花)’·‘아치실(峨谷)’·‘질구실(仙谷의 秩谷)’과 더불어 보은의 12실로 치던 명리(名里)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거치실 마을에 구전되는 말은 본래 黃谷이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장이 서면서부터 인심이 사나워지자 거치실(荒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거치실이라 부르게 된 것은 일제가 지은 이름이 아니라 수 백 년 동안 부르던 우리 이름인 것이다. 여지도서 방리조에 등재되어 있는 荒谷里는 俗籬面 11개 마을 중 ‘사비랑리(沙非郞里:鳳飛)’ 다음 두 번째로 큰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황곡리 : 관문에서 동쪽 15리 거실에 있으며 55호에 남자 132명, 여자 140명으로 편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5. 글을 마치면서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장재리, 장내리, 황곡리는 일부 주민이 주장하는 일제의 잔재가 아니고 우리 선조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고유지명인 것이다. 일제는 1905년 이른바 乙巳조약을 체결하고 우리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하더니 1909년 마침내 우리나라를 병합하고 총독정치를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1914년에 식민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착수하여 회인군(懷仁郡)의 6면 81리 중 북면(北面)의 4개리는 청주군에 붙이고 나머지는 보은군(報恩郡)의 13면 276리와 합쳐 10면 178리로 개편하였던 것이다. 이때 저들은 임의로 우리 고유지명을 멋대로 개명한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소길산의 天王峰을 天皇峰으로 龜峙, 龜巖을 九峙, 九岩으로 고친 것 이외에도 고려때부터 元巖 , 含林谷으로 부르던 곳을 元南 , 鶴林으로 개명하고 新谷을 鳳谿로 고치는 만행을 부렸다.

마을의 이름은 그 곳 주민이 개명을 원하면 살펴서 고쳐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다. 우리 군에서도 다락 밑이라는 의미를 지닌 누저리(樓底里)와 묘지기 집이라는 뜻의 묘막리(墓幕里)를 고쳐 달라는 주민의 건의를 받아들여 1987년 1월 1일부터 각기 누청리(縷淸里),만수리(萬壽里)로 개명하여 부르고 있다.

그러함에도 마을의 이름이 자신들이 뜻과 다르다 하여 무조건 일제의 잔재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닌 것이다. 필자는 상기 법주사나 장내리와 황곡리에 대한 외속리면 주민들의 건의 내용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우리의 고유지명을 일제가 함부로 고쳤다는 그야말로 엉뚱한 주장을 지적하는 것임을 알리며 지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 후에 개명을 건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다.
/김건식 (보은읍 교사3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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