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승면 탄금1리-탄금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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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승면 탄금1리-탄금대마을
  • 송진선
  • 승인 2005.08.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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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삼승면 소재지였던 탄금대 마을
삼승면내 마을 중 어느 마을을 소개할까 찾던 중 과거 면 소재지가 지금의 원남리가 아닌 탄금1리 탄금대 마을이란 것을 알고 탄금대 마을을 찾아갔다.

지난 10일 아침부터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그치기를 바랬지만 그치지 않는 비를 원망하며 마냥 기다릴 수 없어 탄금대 마을로 향했다. 원남리에 닿기 전 서원리 맞은 편 쪽으로 안내돼 있는 탄금1리 마을 이정표를 따라 차를 움직였다.

마을 진입로 양쪽으로 피 하나 없이 잡초하나 없는 논과 이제 푸른색을 띠고 작은 아이 주먹만한 크기의 사과 과수원을 지나 네모 반듯하게 지어진 마을회관에서 이 마을 홍관표(51) 이장과 홍순곤(73)노인회장을 만났다.

특별히 바쁜 시기가 지난 요즘 여느 마을처럼 탄금대 마을도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담소도 나누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누대에 걸쳐 주민들이 거주하면서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억양에 성격이나 성품까지 동화돼 주민 모두가 형제 자매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마을 형국 거문고를 닮아
마을 이름을 지을 때 지형을 인용한 것이 가장 많고 또 나무, 하천, 또 어떤 인물이 살았나하는 것도 많이 작용된다. 탄금1리는 탄금리의 중심마을인 탄금대 마을을 일컫는다. 탄금대(彈琴臺)는 충주의 탄금대와 같은 것으로 삼승면의 탄금대 마을은 하 내망 후산봉과 탄금리 막음골에 옥녀가 않아 거문고를 타는 형국을 보이고 있다. 즉 마을 모양이 거문고와 흡사하다 하여 탄금대라고 불렸던 것.

과거 면 소재지로 100호가 넘을 정도로 매우 큰 마을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탄금 1, 2리로 분리돼 탄금1리인 탄금대 마을은 38가구 91명의 주민이 홍관표 이장, 홍순곤 노인회장, 양경원 지도자, 김순남 부녀회장을 중심으로 오순도순 행복한 마을을 꾸리고 있다.

서원리 금적산에서 발원된 물이 지금은 마을길로 변한 교천(蛟川)이라는 이름의 하천을 흘러 내망리에서 오덕천과 합수됐다. 그러다 마을 내 농경지에 대한 경지정리를 하면서 이 교천은 메워져 마을 안길, 농로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교천은 마을 앞을 지나는 농어촌도로 쪽으로 옮겨졌다.

예부터 드넓은 농경지는 용수도 풍부하고 땅도 기름져 벼농사가 잘돼 하얀 이밥 구경하기가 힘들었던 시절 탄금 마을은 그래도 하얀 이밥을 자주 맛보았던 부유한 마을이었다.

넓은 농경지가 눈앞에 펼쳐지고 버드나무 2그루가 여름철 더위를 피해 주민들이 오수를 즐기고 담소를 즐길 수 있도록 그늘을 만들어주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보통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입구에 서있는 것과 달리 탄금 마을에 있는 180년이 넘은 노거수 버드나무 2그루는 마을 보호수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일제시대 삼승면소재지
지금 서원리 앞쪽으로 나 있는 국도는 일제가 신작로로 닦았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당초에는 길이 없었고 보은으로 연결되었던 길은 탄금대 마을에서 궁고개를 지나야 했고 탄금대에서 원남리 쪽으로 옛날 신작로와 같은 길이 나 있었다. 이는 한일합방 후에도 유지됐고 차가 탄금대 마을에서 원남리 쪽으로 운행됐다.

이럴 정도로 탄금대 마을은 구한말에서 해방 3년 전인 42년까지도 면 소재지였다. 면사무소, 지서, 학교가 위치했다. 면사무소 자리를 찾아보니 마당에 가꿔져 있는 정원수가 행정기관에서 볼 수 있는 정원수 같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건물은 구 면사무소 건물이었을 법한 형태를 보이지 않고 일반 가정 주택 형태와 구조였다. 지서가 있었다는 자리의 건물에서는 지서였다는 냄새를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일반 보통의 주택 구조를 보였다.

또한 1923년 이웃마을인 상가리에 삼승초등학교가 생기기 전까지 탄금대 마을에 사립학교가 세워져 삼승면내는 물론 탄부면 성지리, 청성면 망우리에서도 이곳 사립학교에 와서 공부하는 등 배움의 열기로 가득 찼었다.

지금 마을 보호수인 버드나무가 있고 농구대가 설치된 곳이 과거 사립학교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한다. 버드나무 아래서 쉬고 있는 마을 주민들은 땅을 파보면 옛날 사립학교 때 사용했던 변소의 흔적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이렇게 탄금리가 배움의 터전으로 자리를 할 수 있있던 근원을 찾아보면 조선 숙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한재 송선생이 공주에서 이 마을로 들어와 강당을 건립하고 천자문, 명심보감, 사서삼경을 가르쳤는데 글을 배우려는 학생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 강당 터는 탄금대 마을 동쪽에 있다.

일제의 수탈계획으로 면소재는 원남리로 변경
행정, 경제, 교육의 중심지 이었던 탄금마을의 지위는 1923년 탄금리 인근 마을인 상가리에 삼승초등학교가 생기면서 더 이상 교육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그동안 삼승면내 학생들이 몰려들어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신학문을 배우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탄금리는 상가리 삼승 초등학교로 옮겨가 이곳의 사립학교는 폐쇄됐다.

아이들이 재잘거리고 글을 읽는 소리로 가득하다 아이들도 떠났고 1943년에는 일제가 면사무소와 지서를 원남리로 옮겨 탄금리는 행정의 중심, 교육의 중심지에서 소외됐다. 일제가 삼승면 소재지를 원남리로 옮긴 것은 벼 수탈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이 마을 주민들은 전했다. 원남리에 대농들이 많이 살아 일제가 공출을 편하게 하기 위해 아예 면사무소를 탄금리에서 원남리로 옮기게 된 것이라는 것.

또한 공출할 것을 수송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 신작로를 기존 도로는 무시된 채 국도 19호선 쪽으로 내면서 탄금리는 개발에서 밀렸고 전형적인 농업마을로 안주하게 된 것이다.

논농사 잘되는 기름진 땅
탄금리는 물이 많고 땅이 기름져 논농사가 잘되는 지역으로 이름이 높다. 경지정리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 탄금마을 들은 면내에서 제일 넓은 들판으로 먹을 양식이 풍족해 인심 좋고 마을 주민들의 마음도 넓다.

지대가 낮아 조금만 파도 물이 나올 정도로 지하수가 풍부해 논농사를 짓기가 수월했고 과거 다른 작목보다 소득이 높아 마을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부유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농가는 자녀교육에 관심을 높였고 자식들 대학 진학에 관심을 둬 일부 주민들은 농지까지 팔아가며 자식 공부에 공을 들여 박사, 공무원 등을 많이 배출했다.

IMF 때 구조조정 등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고향에 내려와 있거나 귀농하는 등의 양상이 벌어졌을 때도 탄금리 주민들이 길러낸 자식들은 귀향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로 보면 그렇게 공부해 사회에 나간 자식들이 모두 잘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홍관표 이장은 자랑했다.

이렇게 자식들 공부시키는데 밑천이 된 기름진 땅에서 대부분이 논농사를 짓던 주민들은 이젠 벼농사보다 소득이 높은 사과작목을 도입, 이젠 20% 정도를 점유하고 있다.

삼승면이 사과고을일 정도로 사과재배면적이 넓은 면내 다른 마을에 비하면 아직 탄금리는 사과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쌀값이 떨어지고 쌀을 팔아먹기도 힘든 상황이 되자 탄금리 주민들도 논에 사과나무를 심는 등 사과재배면적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과거 쌀밥은 생각지도 못하고 보리죽으로 굶주린 배를 채웠던 때 다른 마을에 비해 비교적 넓은 들에서 벼농사를 지어 배를 곯지 않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탄금리 주민들. 마을 지형이 거문고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탄금대이지만 마을 주민들이 굶주리거나 고생하지 않고 거문고를 뜯으며 한가롭게 생활했을 것 같은 여유가 느껴지는 마을이었다.

<새로 쓰는 마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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