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부면 임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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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부면 임한리
  • 송진선
  • 승인 2005.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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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많아 마을이름까지 수풀을 쓴 임한이 마을
임한리 뜰은 작물을 재배할 수 없을 정도로 돌이 많은 박토였다고 한다.

‘쾌지나 칭칭 나네’의 민요가사에 ‘임한이 강변에는 자갈도 많네’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자갈이 많다고 한다.

당연히 논은 없었고 농지는 거의 모두가 밭뿐이었다. 산은 없었지만 소나무 숲, 참나무 숲 등 숲이 많았고 마을 소유였던 지금의 소나무 숲 외에 다른 숲은 모두 사유지에 있어서 토지주들은 숲을 없애고 밭으로 개간을 해 지금 남아있는 것은 소나무 숲 하나 뿐이다.

자갈밭에 심은 곡식이라고 해봐야 조, 콩, 보리 정도였다. 배를 곯을 정도로 가난했던 임한리가 마을 역사를 새로 쓴 것은 바로 삼거리 저수지가 생기고서부터다.

농업용수를 공급받게 되면서 온통 자갈뿐이었던 들은 살이 좋은 흙을 성토해 논으로 만들었고 그렇게 옥토로 가꿔졌다.

그러나 세월이 변한 지금 벼농사가 다른 작물에 비해 소득이 높지 않아 먹고사는데 어려움은 없으나 소득은 높지 않다.

가을만 되면 창고에는 수확한 볏 가마들이 가득 쌓이는 것처럼 농민들의 지갑도 두둑해지길 바라는 임한리는 61가구 124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어린 아기들의 울음소리 대신 나이 많은 노인들의 해소, 천식으로 인한 기침소리가 나는 것이 농촌 마을 현실인 것과는 달리 임한리는 이제 한 돌이 채 안 되는 갓난아기가 있고 유치원생도 4명이나 될 정도로 아직은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살아있는 마을이다.

김성구(67) 이장과 유병욱(70) 노인회장, 서충식(39) 새마을 지도자, 김옥연(51) 부녀회장은 젊은 사람이 점점 농촌을 등져 점차 노령화되는 숲 말(소나무 숲 마을)과 아래 말로 구성된 임한리를 한 가족같이 화합하는 마을로 이끌어 가고 있다.

■ 사진작가들에게 유명한 소나무 숲
임한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아름다운 수형을 자랑하는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임한리는 모르지만 임한리에 있는 그 소나무 숲은 보은에 있는 바로 그 소나무 숲으로 불리어지며 사진작가들에게 영원한 사진 소재로 이용되고 있다.

겨울이면 눈을 머리에 인 소나무의 모습이 사진으로 찍히고 봄이면 이제 막 새싹이 돋아있는 숲을 찍고 여름이면 성하를 맞은 소나무의 모습을, 가을이면 노랗게 익은 벼와 어우러진 소나무를 찍는다.

햇살이 퍼지기 전 자태를 확실하게 드러내지 않았을 때 뽀얀 안개가 소나무 숲에 내려앉은 신비한 모습은 사진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소재이다.

자연의 풍광과 농촌의 모습을 주로 찍는 실경산수 사진작가로 유명한 우리고장 출신(마로면 관기리)의 송면호씨 사진 집에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소나무 숲이 실려있다.

그 뿐인가 이제 사진을 배우는 아마추어들도 임한리 소나무 숲을 그냥 두지 않는다. 이제 막 사진에 빠져들고 있는 이들에게도 임한리 숲은 좋은 사진소재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반응이다.

숲이 많아 임한리라 불렸을 정도로 마을의 어원이 되고있는 소나무 숲은 사진작가들의 발걸음이 잦기 때문이 아니라 마을의 귀중한 재산이다.

3900여평에 250년생 정도 되는 노송이 자연적으로 농경지 한가운데 자생하고 있다. 방풍림으로 조성된 것인데 수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녹지공간이 잘 조성돼 있다.

2001년 충북 자연환경 명소 100선에 선정된 이 소나무 숲은 마을 소유이며 그동안은 숲 관리를 마을에서 했으나 100선으로 선정된 후에는 행정기관에서 제초작업을 하고 있으며 화장실과 정자 등 소나무의 풍광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편익시설을 설치했다.

■ 자갈밭이 옥토로
임한리 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이미지는 자갈이다. 얼마나 자갈이 많았으면 민요에 임한리 강변에 자갈도 많다라는 구절이 들어갈까.

아주 좁았던 소로를 차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로 닦으면서 집집마다 군을 서서 신작로에 자갈을 깔았는데 임한리 주변에 흔하디 흔한 것이 자갈이었기 때문에 밭이며 하천에 있는 자갈을 퍼 날랐다. 리어카도 없어서 지게로 져 날라 40∼50㎝가량 두께로 자갈을 넣고 신작로를 다져 한 번 지나가면 뽀얀 먼지를 일으키던 완행버스가 다니는 길을 만들었다.

신작로에 엄청난 양의 자갈이 임한리에서 들어갔지만 표시도 나지 않을 정도였고 지금의 옥토를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삼가천 제방을 만드는 데에도 임한리 자갈이 요긴하게 쓰였다.

노인회장을 지냈던 강대영(80)씨는 삼가천에 제방을 만드는데 주변에 널려있는 자갈로 돌 망태를 만들었다고 한다.

전에는 하천에 제방이 없었고 하천 안에도 밭이 많았는데 여러 번의 홍수로 하천 안에 있던 밭들이 자꾸 떠내려가고 하천 밖에 있던 밭들도 자꾸 떠내려가 하천은 점차 넓어졌다는 것.

30m 정도에 불과했던 삼가천 하폭이 지금은 100m 넘고 임한리 뿐만 아니라 탄부 들, 마로 들의 젖줄이 되었다.

이는 임한리 농경지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과거 자갈이 많으니까 물이 없었고 당연히 논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던 임한리 들은 자갈밭에 흙을 박고 하천수를 끌어들이는 관개시설을 설치해 모두 논으로 바뀌고 농사짓기 좋은 옥토로 변했다.

쌀밥은 명절 때나 겨우 먹을 수 있었던 시절 농경지가 거의 모두 밭이었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전체 농경지 62㏊ 중 밭은 1㏊도 안되는 2000평에 불과하다.

■ 기계 유씨의 집성촌
기계 유씨가 임한리에 터를 잡은 것은 지금부터 340년전인 인조 15년에 부호군(무관 벼슬명) 유 은씨가 정한 후 그 후손들이 이 곳을 떠나지 않고 조상들이 잡은 터를 지키고 있다.

120여호가 넘었을 정도로 큰 동네였던 임한리에 기계 유씨가 아닌 집이 거의 없었고 지금도 50%이상이 유씨로 이뤄진 집성촌이다.

양반상인의 제도 자체가 없어진지 오래된 70년대 초까지도 양반가의 가풍을 유지해왔던 유씨가에서는 아녀자들이 울타리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또 버선을 신지 않은 맨 발로 방밖으로 나오는 것을 아녀자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가풍을 유지해왔다.

맨 자갈밭이고 풀이 무성해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는 데에도 아녀자들은 집안에서만 머물렀다. 당시의 주변 마을과도 사뭇 다른 모습이다.

소가 밭을 갈고 지게를 져서 물건을 나르고 기계 대신 손으로 산다락지에 있는 논에 모내기를 하고 풀약 대신 일일이 손으로 풀을 뽑아야 할 정도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던 때였기 때문에 혼인은 한 가문의 자손을 번창시키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기도 한 것이었지만 여자집에서는 입을 하나 덜고 남자 집에서는 일손을 하나 늘리는 방편이 되기도 하던 때였기 때문에 아녀자들을 집안에만 머물게 한 것은 밖의 일은 남자가 하고 아녀자는 시부모 봉양하고 시누이나 시동생이 있으면 이들을 보살피고 남편을 종사하고 자녀들을 돌보는 철저한 안살림을 맡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확실했다.

지금의 농촌의 노동력이 부녀화 되고 있는 구조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같이 남녀의 관계가 분명했던 기계유씨가 임한리 발전에 기여한 부분은 상당하다.

그런가하면 유창식씨는 일찍이 교육과 지역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한 선각자로서 탄부지역을 비롯해 마로면과 외속리면 지역이 농업기반 시설 확충과 후학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자갈이 많아 논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임한리 일대의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삼가저수지 건설을 위한 기성회장을 맡아 저수지 건설에 앞장서는 등 농업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국민학교가 없었던 1910년경 임한리에 임한사숙을 건립해 임한리를 비롯해 마로, 외속 등지의 학생들 대상으로 육영사업을 펼치는 한편 장안 국민학교(속리 초등학교), 덕동 국민학교(탄부 초등학교) 등의 건립에 기성회장으로 나서서 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하기도 했다.

이같은 유창식씨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가 소나무 숲에 설치돼 후손들에게 교훈을 전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임한리 기계 유씨 선조인 유 홍선생의 행적을 담은 공적비도 소나무 숲에 설치하고 있다.

1590년 중국 명나라의 사료에 잘못 기재된 조선 태조 이성계에 대한 기록을 바로잡는데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후에 숙종과 영조가 친필로 치하의 글을 하사했고 1744년에 후손인 유언익이 원본을 목판으로 만든 것이 광국지경록판목(光國志慶錄板木 : 영조 20년에 조선 왕가의 계통을 바로 잡은 것을 축하하는 경하(慶賀)시를 모아 판각한 것)인데 이 목판은 지난 88년 도 지방문화재 제 164호로 지정돼 외속리면 불목리 제실에 있던 것을 임한리 노인회장을 지낸 유경준씨가 보관하다가 현재는 청주 고인쇄 박물관에 위탁 보관되고 있다.

■ 80년, 98년 대형 수해 두 번이나 겪어
임한리 주민들은 장마철만 되면 불안하게 생활한다. 밤잠을 설칠 정도로 뜬눈으로 지새는 경우도 있다. 80년 수해 때에는 마을 서편에 위치한 상장리 산으로 피하고 98년 수해 때에는 하장 마을회관과 면사무소로 피신했다. 가재도구를 챙길 틈도 없이 몸만 빠져나왔다.

80년 수해주택으로 20년 상환조건의 융자금을 지원받아 지은 주택이 융자금도 다 상환하기 전에 부서졌고, 98년 숫돌 제방이 터져 주택과 농경지가 훼손돼 주민들은 다시 융자금을 지원받아 집을 짓는 악순환을 겪었다.

다시 또 수해를 겪을 것에 대비해 신축한 집들은 1층이면서도 모두 지상에서 최소한 1m이상 높여 집을 지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불안함을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을 가진 임한리도 다른 마을처럼 농업인구가 고령화되어서 주민들은 고소득 작물은 엄두도 못내고 논농사에만 의지하고 있다.

논농사가 수입이 좋은 편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수입 쌀 및 쌀 소비 감소 등으로 더이상 논농사는 소득을 높일 수 있는 작목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고령이 된 지금 작목 전환이 쉽지 않아 논농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김성구(67) 이장은 흙으로 돼 있는 수로에 U자 흄관을 설치해주기를 희망했다.

<새로쓰는 마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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