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세포 혁명이룬 황우석교수의 큰 누님,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저명한 황우석 교수이지만 매일 큰 누님에게 안부전화 하는 사랑스런 막내동생
요즘 정파와 이념, 계층을 떠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은 아마도 황우석(黃禹錫) 교수일 것이다.생가 복원이 추진되고 노벨상 추천 운동이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는 등 한국 사회는 그에 대한 관심으로 온통 떠들썩하다.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생명공학 분야에서 마법의 손이라 불리며 복제기술의 일인자로 인정받고 있는 황우석 교수의 엄마 같은 큰 누님인 황임석씨는 요즘 주변으로부터 축하 인사를 많이 받는다.
신문에 게재된 막내 동생의 기사를 가져오는 친구들이 있는가하면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동생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등 매일 막내동생 얘기로 기분좋은 날을 보내고 있다.
3남3녀 중 막내였던 황우석 교수의 17살 위인 큰 누님 황임석씨는 황교수를 업어주고 기저귀 채우고, 때되면 밥을 먹이는 등 여느 엄마와 같은 큰 누님이었다.
동생을 낳은 것은 엄마였지만 황교수를 키운 것은 큰 누님의 몫이었다. 그렇게 동생을 돌보았던 21살 황임석씨는 황교수가 4살 때 집안의 소개로 수한면 묘서리 김씨 문중의 종가 그것도 장남에게 시집을 갔다.
층층시하이고 가정형편이 어려웠고 남편을 일찍 여의고 혼자 몸으로 자녀 둘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뒤도 돌아볼 여유도 없었고 오로지 앞만 보며 살았다.
막내아들의 총명함을 일찍 간파한 친정 어머니는 초등학교만 부여에서 마치게 하고 중학교를 대전으로 보내는 트인 시각을 가져 황우석 교수는 대전고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서울대 수의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과외로 용돈을 벌었고 3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을 정도로 어렵게 공부했다.
막내 동생이 그토록 어렵게 공부하는 것을 알면서도 큰 누님은 자신의 앞도 가리지 못할 형편이었기 때문에 10원 하나 보태줄 수가 없었던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그래도 이불을 꿰매 팔고 한복을 지어 파는 가게를 운영하는 명색의 이불 한복 혼수점 사장님인 큰 누님은 겨우 이불 하나 만들어 준 것이 전부였는데 막내동생은 결혼하기 전까지 그 이불이 닳았는데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큰 누님에게는 자식 같았고 막내 동생에게는 어머니 같았던 큰 누님에 대한 말이 필요 없는 서로 간의 정이 남달랐다.
황교수 안부전화 하루도 안 걸러
황임석씨는 2002년 폐암 수술을 받았다. 암 수술을 받게 된 동기도 막내동생 황우석 교수의 예리한 눈 때문이었다.
당시 맹장 수술을 했다는 막내동생을 보기 위해 서울대학교 병원을 찾아갔는데 황우석 교수의 눈에는 큰 누님의 몸이 매우 수척해 보였고 병색이 있는 것을 감지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폐암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다는 것.
황임석씨도 몸무게가 줄고 자주 피곤해 했지만 장사하고 또 당시 수한상회가 있던 자리에 도로가 생기면서 현재의 자리로 이사하는 등 일이 겹쳤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수술을 받은 큰 누님은 완쾌되었고 24살 때부터 했던 장사를 43년 만에 완전히 정리하고 수한상회는 세를 주고 건물 2층에서 화분을 가꾸고 신앙생활하며 안정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암 수술 이후 큰 누님이 걱정이 되는 막내동생 황우석 교수는 그 이후로 매일 안부전화를 건다고 한다.
오늘은 뭐하며 지냈느냐, 무엇을 먹었느냐 등등 아주 일상적인 것부터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 다음날에는 자녀들이 왔다갔는가 까지 일일이 챙기며 큰 누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줄기세포의 혁명을 이룬 그 바쁜 와중에도 매일 안부 전화는 단 하루도 빼먹지 않는 그런 인정 많고 사랑스런 동생이다.
그렇게 정이 많은 황우석 교수가 실험실은 커녕 시험관 하나 없는 열악한 현실에서 50여만 번의 시도 끝에 복제 송아지 ‘영롱이’ 생산에 성공하고 처음 큰 누님 댁을 방문했다.
항상 연구비가 모자라 어려움을 겪었던 터라 연구실 학생들에게는 밥을 사주고 본인은 값이 더 저렴했던 자장면을 먹었을 정도로 제자사랑이 두터웠다.
연구실 학생들이 황우석 교수에게 접대를 한다면서 자장면을 시켰더라는 것. 그래서 왜 자장면을 시켰느냐고 했더니 교수님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자장면 아니냐고 했다는 것.
연구비가 모자라 항상 자장면을 먹은 것을 학생들은 자장면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으로 착각을 했었다는 동생얘기를 들었을 때 너무 마음이 아팠다며 황임석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저는 못써도 동기간에게 나눠주고 남에게 줘 아직도 자기 소유의 집 하나 없이 남의 집 살이를 할 정도로 검소하다”며 집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면 “밥은 안 굶잖아요”라고 말할 정도로 검소하다.
24살 때 혼자돼 친정 돌아볼 겨를도 없어
가난한 집으로 시집와서 바로 큰 아들이 태어나고 곧바로 딸이 태어나 자녀들 키우느라 황임석씨는 친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딸의 백일이 내일이면 오늘 남편이 군인 시절 사고 후유증으로 사망, 황임석씨는 지금 같으면 시집가려고 생각도 하지 않던 24살 나이에 청상 과부가 되고 말았다.
시조부모에 시부모까지 층층시하에서 지냈던 황임석씨는 묘서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지만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빚으로 생활하던 시절이어서 이러다간 애들 공부도 못 가르치겠다는 생각에 보은으로 분가,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내복, 머리 빗, 머릿기름 등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잡화, 옷감도 끊어다 동네 구석구석 안가는 곳 없이 발 품을 팔아 물건을 팔았다.
물건을 돈 대신 쌀로 바꾸는 경우도 많아서 짐은 잡화와 쌀까지 한 짐이 되기 일수였다.
갈대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사람이 손짓하는 것으로 착각해 머리에 이었던 짐을 버리고 도망갔던 일도 있는 등 혼자 몸이었던 황임석씨는 당시 보따리 장사를 하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던 고충을 털어놓았다.
충북여고 교사인 큰아들은 삼산초등학교와 보은중학교를 졸업하고 충북고등학교, 대전대, 대전대 대학원을 졸업했고 대전 갈마중학교 교사인 딸은 삼산초등학교와 보은여중 보은여고, 대전대를 졸업시켰는데 자녀들이 학창시절 떨어져 살면서 매일 보고싶은 마음이 하늘에 닿았지만 자녀들이 어쩌다 집에 오면 또 돈 달라고 왔느냐며 맘에 없는 말을 할 정도로 어려웠다.
그래도 그의 희망이요, 큰 버팀목은 두 아들, 딸이었다.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장사를 하고 자식들을 위해 돈을 모을 수 있었다. 힘은 들어도 3만원짜리 가게에서 조금 넓혀 10만원 짜리로 이전하고 그러다 한복과 혼수점을 내자 장사가 더 잘돼 73년에는 300만원 짜리 집을 사는 등 장사에 재미가 붙었다.
온갖 풍상을 견디며 집을 사기 위해 모은 현금 300만원을 요 밑에 넣고 잠을 자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 잠까지 설쳤다. 꿈에도 그렸던 지금의 한복 골목인 보은 종합시장 안 서울 누비 옆에 내 집을 마련하고 수한상회라는 간판을 내걸었을 때는 세상이 내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도시계획 도로를 내기 전까지 그 곳에서 돈을 벌 수 있었고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2002년 6월까지 수한상회라는 이불·한복집을 30년 이상 운영하며 가정을 일궜다.
지금은 집안에 먼지 하나 없이 정갈하게 화초에 잎에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게 살림하는 재미로, 또 보은교회 권사로 신자들과 함께 지내며 그 오랫동안 혼자 지냈지만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이 아직도 바쁘게 생활한다.
한 집의 장녀로, 그리고 한 집안의 종부로 생활한 지금 어렵지만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는 자부심도 크다.
만약 시골에서 얼마 안 되는 농사를 지으며 시부모를 모시며 살아야 한다는 관념 속에서 살았다면, 당시 남아선호사상에 의해 아들은 몰라도 딸까지 대학공부를 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황임석씨의 며느리와 사위도 자기의 남편, 아내를 잘 키워준 시어머니, 장모에게 친부모처럼 살갑게 대한다고 한다.
여기에 사회적으로 학계에선 그렇게 저명한 인사이지만 큰 누님에게는 어리광을 부렸던 막내동생 황우석 교수의 매일 안부를 묻는 전화까지 있으니 오랜 세월을 혼자 지냈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황혼임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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