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자비 새기는 국가지정 문화재 기능 보유자
세상사는 사람이야기초록으로 물든 산사가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승려의 독경소리나 풍경소리가 고요 속에서도 화음을 이뤘던 산사에 일반인들이 전해주는 아미타불 소리가 적막을 깬다.
그리고 마침내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와 자비가 가득하다. 부처님의 복덕을 받기 위해 합장한 불자들이 산사로 발길을 모은다. 매년 음력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날 사찰의 풍경이다.
꼭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더라도 풍경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절을 찾는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깨달은 부처의 모습을 만난다. 그리고 불상을 본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모습, 근엄한 모습, 다양한 표정으로 정교하게 터치된 불상이다. 보통 사람의 손재주로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그 무엇을 느끼게 된다.
사월초파일 세속을 떠나지 않았으면서 세속을 떠나있는 불상조각가인 흔히 하불감으로 불리는 하명석(48)씨의 작업장을 찾았다.
내속리면 사내리 수정동 수정초등학교 옆 그의 작업장은 여러 모양으로 탄생할 불상들이 그의 손놀림을 기다리며 놓여져 있다.
우리가 불상으로 만나는 크기의 좌불상이 있는가 하면 불감에 들어가는 손톱만한 크기의 불상도 있다. 보통의 정교함이 요구되는 작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중에는 붉은 색을 띠는 주목으로 만들고 있는 불감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주문한 것으로 그의 실력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크기가 제각각인 조각도가 세트처럼 놓여져 있다. 이렇게 많은 조각도가 필요할까 의문이 생길 정도로 많았다. 문득 누가 슬쩍(?)하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이퍼질로 인한 나무 먼지들이 작업장에 뽀얗게 앉아있다. 작업장의 풍경이다.
미술분야 비상했던 학창시절
경남 하동 출신으로 형제 중의 둘째인 그가 4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가 가족들을 돌보지 못해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활했다.
부산에서 큰 그는 학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에는 공장을 다니며 목불을 조각했다.
당시 일반 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이 1만3000원∼1만7000원 받았을 때 그는 기술자로 인정받아 7만원을 받았다.
자신의 힘으로 생활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던 그는 학교생활보다는 공장생활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상당수 수업일수가 모자랐지만 그의 형편을 아는 학교에서는 그가 그렇게라도 해서 학교를 마칠 수 있도록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미술분야에 실력이 출중했던 그는 대회에 나가면 각종 상을 휩쓸었고 그가 그리는 것이 빛이 났다. 중학교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우연히 방학숙제로 만든 ‘소가 쟁기를 끄는 모습’ 목조각이 경남도내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그렇게 목조각에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 당시 만들었던 조각품 중 말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데 ‘살아서 뛰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지금 봐도 든다고 전한다.
미술 교사는 그가 만든 조각품을 보고 “너는 그림 쪽보다는 조각이 낫겠다”고 조언했다.
그 길로 그림 대신 조각 쪽으로 바꿨고 고등학교 때에는 홍대 교수에게 인체조각하는 것도 배웠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불가와 인연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고모님이 계시던 부산 범어사에 자주 들려 그때 스님이 만들던 목불전을 보았고 그렇게 해서 만들게 된 것이 목각으로 만든 불상이었다.
이때 만든 목불은 일본 수출품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렇게 아르바이트로 학교를 마치고 이를 계기로 전통문화재 조각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군 병영생활 중에도 병환 중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3개월간 모시다 보니 자연 일찍 군 생활을 마치게 되어 공백기간을 보내기 위해 지리산 칠불사를 찾게 된다.
이때 사찰에 화재가 나 목불과 칠불탱화를 복원하는데 참여하다 보니 6년 동안이나 칠불사에서 생활을 했다.
국내 최고라고 일컫는 스승에게 목불 조각을 배웠고 오랜 숙련을 거친 후라서 그의 내공은 가히 국내 최고라는 자부심을 내세울만했다.
83년 1월 칠불사에서 나오면서 그는 국내 조계종 거의 모든 절에 그의 발자취를 남겼고 일본에서도 8개월간 생활하는 등 방랑이 시작됐다.
불모(불(佛母 : 부처를 탄생시키는 사람이란 뜻)인 그는 모든 절에서 기쁘게 맞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국내 조계종 절은 거의 다 다녔다.
그러면서 불상 조각은 계속해 그가 만든 불상이 모셔져 있는 절만 해도 합천 해인사, 부산 범어사, 순천 송광사, 울산 한마음선원 등 규모가 큰 사찰부터 작은 암자까지 200군데가 넘는다.
칠불사를 나와 선방에서 공부하다 법주사 재무스님이었던 각현스님과 인연이 돼 법주사에서 생활하던 중 84년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문안사에서 불상조각을 의뢰받았다. 그것이 그의 이름을 걸고 만든 불상 조각 첫 작품이다.
그리고 86년 부산 아가씨와 결혼, 속리산에 방1칸 얻고 천막을 친 작업장을 만들면서 그의 방랑은 종지부를 찍었다.
88년 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인정
불상조각이나 탱화의 수준은 웬만한 사찰스님에게는 익히 인정받았던 하불감은 지난 88년 2600여명이 응시했던 전통문화재조각시험에서 합격, 문화재기능보유 1138호로 지정됐다.
그가 칠불사에서 나올 때 함께 나왔던 그의 제자 1명을 포함해 신혼살림을 차렸던 속리산 그의 작업장에는 10명의 직원들이 있었다.
이미 내공을 충분히 쌓은데다 문화재 기능보유자까지 지정되자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경기도 하남시에도 있는 그의 작업장에도 제자들이 있는데 그림이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일정 수준이상이 되지 않으면 그의 제자가 되기가 힘들 정도로 그의 훈련은 혹독했다.
그렇게 그의 훈련 과정을 거쳐 지금 독립한 제자가 해인사 사하촌에서 불상조각을 하고 있다. 그가 집도했던 조각도만 600자루가 넘는다고 한다. 처음 썼던 칼 2, 30자루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그의 이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옛날에는 대장간에서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 맞게 직접 불에 쇠를 달궈 조각도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불상을 조각하는 나무는 은행나무가 가장 많이 쓰인다. 벌레가 끼지 않기 때문에 수명이 오래가기 때문이다.
속을 파내지 않으면 갈라지거나 뒤틀릴 수 있기 때문에 속을 모두 파낸다. 그래서 대작은 2인조가 돼서 한 명이 조각도를 대고 있으면 다른 한 명이 망치로 두드려 불상 속을 파낸다.
그만큼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지금은 드릴을 이용해 속을 파내기 때문에 작업도 그만큼 쉬워졌다.
근엄한 분위기가 특징
조각된 나무 불상 본체에 삼베를 붙이고 옻칠을 한 후 금도금을 하는 과정을 거쳐 탄생되는 우리가 사찰에서 보는 불상은 수인(손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즉 비로자나불 등 아미타불, 지장보상, 관세음보살 등 30여종이 넘는다.
그저 나무 한토막에 불과했던 것도 백팔번뇌를 뒤로 한 하불감의 세심한 손놀림에 자비롭고 인자한 불상으로 모셔진다. 손에 든 조각도 하나면 무에서 유가 탄생하고 번뇌도 자비로 바꾸어 놓는다.
하불감이 만드는 불상은 근엄하다는 것이다. 눈, 코, 입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 하불감이 가장 정성을 들이는 것이 눈이다.
또 미소를 크게 줄 수도 있고, 엷게 할 수도 있고 아예 미소를 없게 할 수도 있다. 그에 따라 불상이 주는 분위기가 달라진다.
하불감이 제작하는 불상은 미소가 없는 근엄한 분위기의 불상이다. 미소가 있으면 가벼워 보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전국 사찰을 다니면서 보면 누가 제작했는지 알 정도로 제작자마다 특징을 갖고 있다.
조만간 하남시에 있는 작업장을 속리산으로 통합해 전시관을 겸한 작업장을 만들고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 흉상도 만든 바 있어 불상 조각뿐만 아니라 일반 흉상도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다.
하루 마시는 소주 5병, 담배 3갑도 모두 좋은 작품을 만나기 위한 과정으로 산에서, 들에서, 거리에서, 때론 술잔 앞에서도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번뇌를 계속하는 하불감은 부인 김영하씨와의 사이에 대학생인 딸 보람과 보은중학교 1학년인 아들 지웅 남매를 두고 있다.
이중 미술에 소질을 갖고 있는 아들 지웅이 작업장에 들러 자신도 불상을 조각해보는데 솜씨가 제법이다.
꼭은 아니지만 아들이 후계를 이뤘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하불감은 한 달이면 두 세 차례 고향을 찾는데 그때마다 담배며 소주 등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지역에서 구입해간다.
자존심 강한 그의 애향심이다. 방랑생활을 접고 둥지를 튼 제2의 고향 속리산에서 생활하며 얻은 불상조각에 갖는 철학만큼 강한 또 하나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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