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딛고 일어선 탄탄한 중견 물류회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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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딛고 일어선 탄탄한 중견 물류회사 대표
  • 송진선
  • 승인 2005.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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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북 대안 출신 재 대구 보은향우회장 김 창 환
정상인보다 정상인 그

4월21일 장애인의 날 인물로 대구향우회 김창환(58) 회장을 선정했지만 대구 화물터미널 내에 있는 창진운수 사무실에서 대구 향우회 사무국장과 총무와 함께 한 자리에서 김창환 회장이 걸어온 삶에서 장애인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골반 뼈가 부러져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 외에는 감쪽같다.

왼쪽 다리가 의족인데도 불구하고 지팡이도 없이 다니고 걸음걸이도 정상인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정상적이며, 2000년에는 걸어서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의지를 보여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말 장애인이 맞아?” 할 정도로 그는 장애인이라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특히 그의 사회활동을 소개하면 전혀 신체적 장애를 가지지 않은 정상인 보다 더 적극적으로 생활하고 카리스마가 있고 통솔력을 보이는 삶이다.

85년 대구 라이온스에 입회에 지구 부총재까지 지냈고 현재는 라이온스 대구시(355-C)지구 고문을 지내고 있으며 대구 거주 충청도인들의 모임인 충우회 부회장이기도 하다.

또 대구시 장애인협회 수석 부회장, 대구시 장애인 체육회 부회장, 대구대학교 CEO 과정 총 동창회장, 기타 행정기관의 무슨, 무슨 위원회에 속한 것은 치지 않아도 그의 한 달 일정은 빡빡하고 이같은 사회활동을 하면서 봉사를 생활화 해 그의 집무실은 온 벽이 공로패, 감사패, 감사장 등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회장으로 추대하는 단체마다 시간이 없어 사양해 왔는데 그동안 너무 사양해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어 회장을 수행해야 할 판이다.

모두 봉사단체이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다소 시간적 여유가 없지만 이왕 할 거 기분좋게 수행하고 또 그들과의 만남을 즐길 계획이다.

비장애인으로 서기까지
내북면 대안리 바깥대안 부잣집 2남2녀 중 장남이었던 김창환 회장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그의 부모들이 거는 기대가 대단했다.

내북초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주위의 많은 학생들이 시험을 치지 않았던 미원 중학교를 갔을 때에도 그는 보은중학교 입학 시험을 쳐서 유학, 읍내 고모댁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먼거리의 학생들이 자전거로 통학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부모님 밑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자전거 통학을 시작했다.

대안리에서 중학교까지 20㎞에 가까운 거리였지만 본인이 원하던 통학이었기 때문에 힘든 줄 몰랐고 안정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이원리에서 등교하는 자신을 트럭이 들이받았고 청주시내 한 병원으로 실려간 후에도 20일 이상 깨어나지 못하는 심각한 사고를 당했다.

의식을 찾고 살펴 본 자신의 모습은 왼쪽 다리는 잘린 채 의족을 한 상태였다.
남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쉽게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당시 그는 사춘기까지 겪던 시기여서 죽고 싶은 심정뿐 살아갈 희망을 갖지 못할 정도로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런 장남을 눈물로 지켜보던 그의 어머니는 수소문 끝에 의족을 하고서도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는 도청의 한 공무원을 찾아내 자신의 아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줄 것을 부탁, 김창환 회장에게 의족을 하고서도 잘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런 몸으로 살면 뭐하나 하는 생각에 죽음까지도 생각했던 김창환 회장은 걷기 연습만 잘하면 괜찮겠다고 마음을 다잡았고 사람들이 잘 때 잠 안자고 목발 짚고 걷는 연습을 했다.

그런데 의족을 하고 걸으면 허물이 다 벗겨져 피가 나는 등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고비를 넘기기 위한 피나는 노력으로 드디어 비록 의족이지만 두발로 선 정상인이 되었다.

달리기를 좋아해 100미터 달리기에서 12.3초를 기록할 정도로 펄펄 날았고 운동은 무엇이든 잘했던 그가 단 하나 달릴 수 없다는 것도 견디기 힘든 현실이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긍정적인 사고를 갖는 생활의 변화까지 가져왔다.

그렇게 보은중학교를 휴학하고 1년 뒤 청주중학교로 전학해 이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학업에도 열중해 청주 기계공고를 진학하고 청주대 상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사회인으로 우뚝섰다.

중견 물류회사로 이름 날린 기업가
보은, 청주에서만 생활하다 71년 낯선 땅 대구에 기반을 잡은 것은 모험이었고 남의 도움없이 한 번 성공해보겠다는 그의 도전정신에서 비롯되었다.

동대구역장이었던 외삼촌이 언덕이 되어 주기도 했지만 7년간 대한통운에 근무하며 물류 수송 및 하역, 집배 과정 등을 익힌 그는 총무부장을 끝으로 과감히 사표를 내고 트럭 5대로 동일운수를 설립, 물류사업을 시작했다.

학연,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매우 보수적이고 텃세까지 심한대구에서 외지인에다 장애까지 가진 김창환 회장이 사업을 하는데 겪는 어려움은 그의 인생에 또 다른 시련을 줬다.

어렵사리 키워 안정궤도에 들어설 즈음 발생한 부도로 정말 집도 절도 없이 밖에 나앉아야할 형편이었던 김회장에게 그의 어머니는 낯선 곳에서 고생하지 말고 보따리 싸들고 다시 오라고 성화였고 김회장 자신도 이곳 생활을 접을까 하는 생각을 수 차례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이름 중 창과 아들 이름의 진을 합한 창진통운을 설립, 재기를 했고 김회장은 인정많은 충청도 인심을 대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베풀면서 사회활동을 시작하며 그의 이름 석자를 대구 사회에 알리기 시작했고 사업영역을 확대해 갔다.

그리고 일류 회사로 키우기 위해 물류 선진국인 일본을 견학, 100% 윙바디를 설치한 탑차를 보고 곧바로 100% 차량에 윙바디를 설치했다.

이같은 안전 물류수송 기반을 갖춘데다 보관, 하역, 적기 배송 등 물류전문 회사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또한 질높은 서비스로 고객을 응대해 창진운수는 업계에서 두각을 보였고, 삼성과 엘지의 제품 운송을 담당하는 계약까지 체결하게 되었다.

안전하게 적기 배송하는 정식과 신용이 사세 확장을 가져와, 대구 화물터미널의 주주에다 창고업까지 영역을 넓혔다.

현재 차량 100여대에 연 8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견실한 중견 물류업체로 성장했다.

청주대 재학시절 연애해 졸업하고 결혼한 부인 유병순(58)씨와의 상에 둔 무녀독남인 아들(29)이 아주공대 정밀기계공학, 한양대 공대 대학원까지 나온 정통 엔지니어 출신이지만 연봉 5∼6000만원 버느니 가업을 물려받으라는 아버지 김창환 회장의 압력에 지금 창진운수 창진물류의 이사로 있으면서 기업경영에 대해 트레이닝 중이다.

김창환 회장이 아들에게 물류회사의 경영수업을 시키는 것은 중국이 2008년 올림픽이 끝나면 경제대국으로 부상, 전 세계 무역을 주름잡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동북아 물류의 중심 거점이 될 것이라는 비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100억원 이상 매출 신장과 츄레라 회사를 인수 중에 있으며 경기도 파주, 천안, 오창에도 지점을 설치할 계획에 있는 등 김창환 회장의 창진운수·창진물류는 증가하는 물류를 담당할 기지를 다지고 있다.

보은향우회원들의 울타리 역할
87년 처음 10여명의 보은 출신들이 계모임으로 운영하다 문호를 개방해 2000년 향우회를 조직했다.
대구에 살고 있는 보은인들은 줄잡아 3∼400명은 되겠지만 회원으로 가입한 향우는 60여명에 불과하다.

아직 향우회가 열악해 많은 사업을 벌이지 못하지만 앞으로 대구향우회원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도 지급하고 또 고향의 보은군민장학회에도 후원하고 보은군 발전협의회에서 벌이는 사업도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걸어온 삶, 그리고 원대한 목표와 도전정신, 장애를 가졌으면서 결코 장애의 몸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김창환 회장은 “할 수 있다는 의지만 가지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장애인의 날을 즈음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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