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침범 중국어선 납포하다 피랍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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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침범 중국어선 납포하다 피랍돼
  • 송진선
  • 승인 2005.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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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동안 중국에서 억울한 감옥살이
수한면 묘서2리 83-5번지. 해양경찰로 근무하다 12년간 중국에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고 한때 행방불명자로도 처리되기도 했던 억울한 사연을 안고 있는 안영진옹(80)이 사는 곳이다.

그동안의 억울한 사연을 중부기관에 진정한 안영진옹의 억울한 사연이 전국적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중앙언론기관에서 부터 지방언론까지 전화는 물론 그의 집은 취재일정으로 빽빽히 잡혀있었다.

억울한 사연인즉은 당시 해양경찰대 소속 견우정 대원이었던 안영진옹을 비롯해 박래봉(부산), 김창호(제주), 주시완(인천)씨가 1955년 중국으로 피랍돼 12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돌아왔으나 정부로부터 유공자는 물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어렵게 생활해 왔다는 것을 2월20일 청와대와 국무총리,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대법원 등에 진정한 것이다.

당시 경사였던 안영진옹은 12월25일 새벽 4시경 200톤급 견우정에서 근무 중 우리 영해에서 불법 조업하는 중국어선을 발견하고 당시 순경이었던 위 3명과 함께 중국어선을 납포하기 위해 중국어선에 올랐다.

이들은 중국 어부들을 신속히 제압하고 기관실 등을 장악해 끌고 오던 중 추격해온 7~8척의 중국어선과 총격전을 벌이게 됐고 그러다 본선인 견우정과 떨어지면서 중국에 피랍됐다.

교전 중 중국어선에서 수류탄을 던져 그의 몸에는 30여개가 넘는 파편이 박혀 온몸이 으스러졌고 피랍되던 중에도 총기의 머리 등으로 구타를 당해 피범벅이 된 상태에서 실신, 중공 정부로 넘겨져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와 지난(濟南)시의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안영진옹은 경사계급이었기 때문에 감옥살이 중에도 5~6개월에 걸친 수술로 수류판 파편을 제거하는 등 수술이 이뤄졌으나 아직도 파편 3개는 몸에 박혀 있는 상태다.

이들은 1967년 4월 중공 정부가 구형한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 홍콩의 영국 대사관으로 넘겨졌고 그곳에서 한국 영사에게 인계돼 대한민국으로 귀환했다.

61년 11월까지는 해양경찰대 소속으로 돼 있어 종전대로 임금이 지급되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행방불명으로 처리돼 임금 지급도 끊겼고 가족들 역시 생계가 막막한 상태에서의 가장의 행방불명 소식에 가족들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행방불명 됐다던 사람이 살아서 돌아온 날 서울로 마중을 나간 부인 이연숙(80)씨 등 안옹의 형제들은 머리가 하얗게 세고 눈동자가 하얗게 풀릴 정도로 피골이 상접해 있던 안옹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대한민국 해양경찰의 기상을 보였다며 해양경찰대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식을 받았고 보은에서도 환영식을 받고 귀환한 안옹은 7개월만인 1967년 12월10일자로 복직돼 6년간 근무했지만 후유증으로 더 이상 근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파 퇴직을 하고 말았다.

이들은 중국에서 옥살이를 한 기간이 복무기간에서 빠져 퇴직금 및 연금에서도 손해를 봤고 보훈병원 등에서 후유증 치료도 받아보지 못했고 지난해 8월 주옹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박옹는 당시 고문으로 청각을 잃었으며 안옹과 김옹 등도 모두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려 매일 병원신세를 져야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다.

1948년 보은경찰서에서 경찰로 재직한 안옹은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군부대로 편입돼 인천 상륙작전에 참여 훈장(나중에 6?25참전 경찰 증서를 받게된 증거물이 됨)을 받았으며 경사로 승진했고 휴전 후 제천 경찰서로 발령이 나 근무 중 1951년 부산 해양경비대가 창설되면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를 해 이같은 변고를 당한 것이다.

19살때 또래였던 내북 초개(지금의 보은읍 중초) 이연숙씨와 결혼 1남1녀를 뒀고 남편은 부산에서 생활하던 중에도 자녀와 큰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생활했고 남편이 피랍돼 옥살이를 하고 또 행방불명됐다는 소식도 접하면서 슬하의 자녀만큼은 잘 키워야 했기에 실, 화장품, 양말, 내복 등으로 꾸린 보따리 장사로 옥천까지 다녀 자녀를 키웠다.

억척스럽게 돈을 모은 부인은 집 한 칸, 땅 한 평 없던 당시 땅도 사고 행방불명된 남편이 살아 돌아왔던 68년 초가삼간 집을 지어서 분가하고 보따리 장사도 접고 농사를 지었다.

남편은 후유증으로 농사도 지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부인의 고생은 계속됐지만 살아있는 남편과 또 잘 커준 아이들을 보며 모든 고통을 감내했고 어렵게 어렵게 큰딸은 중학교까지 아들은 고등학교까지 뒷바라지를 했다. 지금 두 자녀는 58세, 56세로 장성했다.

안옹은 날이 궂을 것을 몸이 먼저 알아차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쑤신다고 한다.

여느 날에도 약과 병원신세를 지지 않으면 지내기 힘들어 날이면 날마다 병원을 찾고 있는 안옹은 몸이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정부의 처신에 더 울화가 치민다고 한다.

2월20일 민원을 낸데 대해 3월9일 민원을 낸 기관마다 답신이 왔는데 청와대와 국무총리에서는 해당기관으로 민원을 이첩했다는 식으로 서로 떠밀고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서는 행방불명 기간은 임금 미 퇴직금을 적용할 수 없다는 등의 답신내용에 대해 안옹은 왜 국가에서 우리를 찾아보지도 않고 행방불명 신고를 했고 또 국가를 위해 싸우다 피랍된 것인데 국가유공자로도 지정해 명예를 회복시켜줘야 마땅한 것 아니냐며 그것이 더 억울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옹은 94년 김영삼 정권 때 한 번 민원을 제기했으나 그때만 해도 세월이 세월인지라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래도 민주화가 많이 되었다고 판단한 참여정부에 와서야 진정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해경에서는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서 안옹 등이 진정한 해당 민원서류를 넘겨받아 당시 사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관계기관과 해결방안을 협의 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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