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포기 사과로 1억 소득올리는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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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포기 사과로 1억 소득올리는 명인
  • 송진선
  • 승인 2005.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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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승 천남3리 사과기능장 이명희씨
세상사는 사람이야기

올해 9월부터는 수입쌀이 우리의 식탁에 오른다고 한다. 한국과 칠레간 다자간 무역협정으로 칠레산 값 싼 과일이 무한정 수입되고 이제는 일본과도 협상을 해야 한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고비용 생산체계로는 수입산과 경쟁에서 뒤진다는 것이 농민 뿐만 아니라 농업기관 등의 분석이다.

농민들의 겪을 어려움이 불을 보듯 뻔하다. 영농기인 3월 과수원에는 전정작업을 하고, 두엄을 내고, 모내기를 위해 논을 갈고, 밭의 해묵은 고추비닐을 걷는 등 농사준비로 농촌 들녘은 분주하다.

우울한 영농기이지만 개방 파고를 극복하며 전문 기술을 습득 연간 1억원 이상의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군내에도 25농가나 되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농민들에게 전문 농업으로는 수입산과도 경쟁해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1억원 이상 소득을 올리는 농가 중 사과 전업농인 보은군 최고 명장이자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이명희씨를 선정해 보도한다.

대학보다 어머니 지킨 효자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꿈은 대학 진학이다. 집안의 장남이었던 이명희(45)씨도 집안 사정이 매우 어렵고 아버지도 여덟 살 때 여의었지만 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기 때문에 대학입시까지 치르고 합격까지 했다.

그러나 애꿎은 운명은 그를 대학에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위가 좋지 않았던 어머니가 위 수술을 받아야 했고 마침 장남인 이씨의 대학 등록금이 병원비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자연히 이명희씨는 33살 때 혼자 돼 그동안 자식들을 위해 고생만 하던 어머니 대신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과감히 캠퍼스에서 보낼 낭만을 버렸다.

그 때의 어려웠던 상황을 그의 어머니는 위로 누나가 있고 남동생, 막내 여동생까지 2남2녀인 형제 중에도 이명희씨가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했고 아마 공부를 했으면 동생보다 더 잘했을 것이라며 대학을 보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동생도 공부를 잘해 지금은 국민연금 관리공단에 취업을 했지만 행정고시에 1차 합격했을 정도인데 형인 이명희씨가 더 잘했다는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듯이 그는 대학 공부대신 인생공부 흙 공부 농산물 공부를 해서 이 분야의 최고가 되었다.

대학을 포기한 이명희씨는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갔다. 그러나 촌에 혼자있는 어머니가 맘에 걸려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농사거리도 없는 가난한 농민의 삶을 장남에게 대물림을 하지 않기 위해 도시로 쫓아버렸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이명희씨는 다시 짐을 싸들고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러기를 서 너번 했을까 25살 봄에 완전히 귀향을 했다.

효자 이명희씨는 그제서야 어머니를 모실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안정을 찾았고 농사꾼 이명희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650만원 빌려 구입한 5000평 개간

고향으로 들어와서 그가 처음 한 일은 농사거리를 만드는 일. 이명희씨는 겁도 없이 남의 돈 650만원을 빌려 밭 2000평과 산 3000평을 구입했다.

밭에는 고추를 심고 산지는 개간해 사과나무를 심었다. 당시만 해도 산지 개간 허가가 까다로워 허가 절차를 밟다 몰래 나무를 베고 사과나무를 심어버렸다.

밭에 식재한 고추농사가 잘됐고 말린 고추는 보은장, 옥천장까지 직접 가지고 가서 팔았는데 헌 오토바이를 구입해 옥천장까지 오토바이로 수송해서 팔았다.

옥천 장을 가는 도중에 헌 오토바이가 펑크, 옥천장까지 끌고 가서 고쳤던 일도 있는 등 고추농사를 지으면서 겪은 에피소드도 눈물겨웠다.

그렇게 어머니와 이명희씨가 고추농사 1년 지어서 번 돈으로 땅을 사기 위해 빌렸던 돈 650만원을 모두 갚았다. 운이 터졌던 것이다.  처음 땅 샀을 때부터 주변에서 100만원 더 얹어 줄테니 팔라는 유혹의 손길이 뻗쳐왔는데 1년 만에 빌린 돈을 다 갚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땅을 사겠다는 분위기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당시 삼승면에 사과농사를 짓긴 했어도 기술이 공유되지 않았고 또 사과가 능금이라고 할 정도로 돈이 되는 나무였기 때문에 재배기술을 알기가 쉽지 않았다.

이명희씨는 자신의 꿈을 사과나무에 걸었기 때문에 자신이 부족한 기술 습득을 위해 교육, 책, 자문 등 닥치는 대로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과를 생산한 농민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쫓아갔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쫓아가 기술을 배우는데 시간을 투자했다.

점차 기술도 늘었고 품질도 좋아졌고 내 사과도 나무를 식재한 지 5년 만에 처음 3000평에서 12짝을 땄다. 먹지 않아도 배불렀다. 아들을 둔 것 같은 든든한 느낌이었다.

결혼도 하고 과수 기능장도 되고

지금은 전문 농업인들은 샐러리맨들보다 연봉이 훨씬 높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농민들에게 시집을 오는 여자들이 많지만 80년대, 90년대만 해도 농촌총각문제가 지금보다 더 심각해 결혼을 하지 못한 농촌총각들이 자살을 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보도되던 때였다.

용케도 이명희씨는 힘들이지 않고 농사도 안 지어본 금산아가씨를 만나 결혼을 했다.

사과 과수원을 한다는 말을 듣고 힘들게 일을 하는 줄도 모르고 맛있어 보이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 보기만 해도 좋은 목가적인 과수원 풍경만 생각하던 동갑내기 김은순씨와 화촉을 밝혔다.

본격적으로 사과를 수확하던 이명희씨는 색깔, 당도, 크기 등에서 다른 농가와 비교해 월등이 나았고 대전 공판장 등에서 제일 높은 가격을 받았다.

사과가 체질에 맞고 사과를 선택한 자신이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을 한 이명희씨는 93년 농업경영인으로 선정됐고 97년에는 과수 전업농으로 선정됐으며 남의 땅도 7000평을 임대해 과원을 늘려나가는 등 사과에 운명을 걸었다.

올해도 3000평의 산지를 개간하고 있는 중에 있는 등 남의 땅까지 포함하면 그가 경작하고 있는 사과 과수원만 1만4000평에 달한다.

그의 부인 김은순씨는 과장이겠지만 “보물 1호가 자신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사과라고 할 정도”라며 “봄에는 밤 10시, 11시에도 들어올 정도로 일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일이나 실컷하라”며 볼멘소리도 작작해댔고 신혼 재미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일에 파묻혀 있었다고 전했다.

사과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좋은 사과는 먹지 못하고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을 먹는다며 큰 아들을 임신했을 때 사과가 먹고싶어서 좋은 사과를 따먹으려고 맘을 먹어도 남편이 애지중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까치가 파먹어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을 먹었다는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게 작업의 피로를 풀 사이도 없이 일에 매달리면서도 이명희씨는 품질좋은 사과를 생산하기 위해 나름대로 연구도 하고 또 견학도 다니고 교육도 받으며 높은 소득을 얻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몰랐다.

사과에 대한 열정으로 1999년에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자비 150만원을 들여 관광코스 단 한 곳도 없이 이탈리아의, 사과 연구소, 사과단지, 묘목장, 가공공장 등을 견학했는데 돈이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정도로 보람을 많이 느꼈으며 묘목 생산 및 친환경 재배에 대한 눈을 떴다고 한다.

지금 저농약으로 사과를 생산하고 있는 이명희씨는 육묘장을 조성 묘목도 직접 생산해 자신의 농장에 들어갈 고품질 곁가지 사과 묘목을 자신이 직접 생산해 식재하고 있다.

1998년 군 농업인 대회 과수 대상, 2000년 충북도 풍년농사 한마당 행사에서 이명희씨의 사과가 대상을 차지했다.

이명희 사과 전국 명성 연간 1억8000만원 소득

이명희씨가 생산하는 후지, 양광, 홍로, 홍장군 품종의 사과는 색깔, 당도, 크기 등에서 월등하다는 평을 듣는다.

지난해 과수연합회가 주최해 유통업체마다 첫선을 보이는 행사에 전국의 내노라 하는 사과 중 예산 사과와 이명희씨의 사과를 선정해 서울 영등포 삼성 홈플러스에 150상자를 입점, 판매했는데 예산 사과보다 이명희씨가 생산한 사과가 더 맛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 이명희씨는 18㎏상자로 연간 2700상자 정도 수확하는데 서울 양재동과 대전공판장을 통한 유통 80%, 택배 등을 통한 직거래 20% 정도 되는데 택배를 통한 판매는 단골 고객으로 2000명이 넘는다.

이같이 시장 가격 정보를 수집해 연중 분산 출하하는 방식으로 연간 1억8000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슬하에 16살, 15살인 아들만 둘을 둔 이명희씨는 97년 방송통신대 1학년까지 다니다 중도에 포기한 적이 있지만 사과만큼은 전국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정해 내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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