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사람이야기- “서당골농원은 내 인생의 작품, 가장 큰 보람”
야당활동한 아버지 영향 취업도 안돼학원운영하다 가업 잇기 위해 낙향
도의원 한 것은 인생의 가장 큰 실수
‘표 의식 행동 안돼’ 선출직 공직자들에게 조언
보은에서 가장 부잣집 아들이었다. 사업도 승승장구해 보유하고 있는 사업체만 해도 6, 7곳 되는 중소기업체 사장이었다.
있는 티 안내고 봉사활동도 하며 왕성한 사회활동도 했다. 지역사회에서 두각을 보이는 활동을 했는데 어느 순간 세대교체가 된 것 처럼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
박상호(70)사장이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올려놓으며 외부활동을 하지 않아서이지 여전히 그 옛날 모습 그대로 전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은읍 죽전리에서 가업인 도정업을 왕성하게 하고 있었다.
인간 박상호
보은에서 태어나 학교생활 빼고 보은에서 생활한 그이지만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삼산초등학교를 나와 청주 고등학교, 고려대학교를 나온 그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형 박맹호(현 민음사 회장)씨와 아버지가 마련해놓았던 서울 용산 삼각지 2층 건물에서 비룡학원이란 이름으로 영수학원을 운영했다.
오랜 야당생활을 했던 집안이었기 때문에 취업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물론 정치사찰도 심했던 때이다.
학원 주변에 군부대가 있었기 때문에 영어를 배우러 오는 군인이 많았고 군 행정병을 할 수 있도록 한글타자를 가르치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한글 타자가 처음 나올 때 일명 공병호 타자 30대로 한국 행정기술학원도 겸했다.
학원은 탄탄대로 운영이 잘되었는데 도로확장으로 건물이 헐리게 되자 학원은 동생 박상호씨가 맡고 형 박맹호씨는 그때 서울 종로구 관철동 5층건물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민음사라는 간판으로 출판사를 했다.
학원 재무사정도 그리 좋지 않아 전기료도 못내 전기도 끊겼던 적도 있는 등 근근히 이어가는데 만족하는 수준이었다.
27세부터 33세까지 학원을 운영했던 박상호씨는 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4번 출마하는 동안 청주에 있던 금싸라기 땅 및 100여대의 버스를 보유한 충북여객과 신흥운수 등 많은 재산을 팔아야 했고 중앙 사거리 방앗간과 땅 일부가 남았을 때 아버지(고 박기종옹, 민주당 소속으로 6대 국회의원 지냄)의 부름을 받고 보은으로 내려와 비룡소에 거주하며 아버지 사업을 도왔다.
정미소를 맡아 운영하던 박상호씨는 당시 통일벼 생산으로 정부에서 정부양곡을 사는게 많아지는 것을 보고 정부미 보관창고를 지었다.
양곡을 찧고 보관하면서 돈이 회전되기 시작해 가업은 안정을 되찾았고 박상호씨는 사업의 전성기를 맞아 정미 사업에서 서비스 산업까지 사업을 확대했다.
보은관광, 대일관광을 운영, 보은과 청주, 서울에까지 사업소를 뒀고 보은교통, 죽전 정부양곡 도정공장, 원남 미곡종합 처리장, 성지리 건조 저장시설, 이평리 정부양곡 보관창고, 주유소, 100여만평의 속리산 레저타운, 서당골 관광농원 등 지역에서 손꼽히는 갑부였다.
충북도 운수협회장, 충북도 경영자협회장 등 도 직함을 가졌을 정도로 그는 보은군에 국한된 경영인이 아닌 도의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는 인사였다.
미국에라도 도망을 갔어야 했는데
박상호씨가 고향에 내려왔을 때는 국회의원 육인수씨가 곧 군수요 도지사나 다름 없었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했고 당시 지역에서도 유지라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공화당 소속으로 활동을 하고 그들이 주름을 잡았었던 때였다.
야당생활만 하던 집안이었기 때문에 사회생활도 거의 하지 않던 당시 지역에서 4년제 대학교를 나왔던 그래도 엘리트라고 하는 몇몇 사람이 지역이 이래서는 안된다며 지역을 쇄신해보자고 의기 투합, 신풍운동이 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82년 설립된 보은회이다. 민관협의체로 회장을 박상호씨가 맡고 박대종씨가 사무국장을 맡아 출발했다.
군수가 엽연초생산조합장이 누구인지도 모르던 관선시절 민관협의회가 만들어져 기관간 관계가 유연해지고 기관과 지역을 뭉쳐놓는 계기가 됐다.
보은회장을 맡은 후 그에게는 당시 철저한 관변단체였던 자유총연맹 지부와 새마을회도 책임을 맡기려는 움직임이 많았고 적극 고사하던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들 관변단체의 책임을 맡는 등 어느새 여당생활이 시작됐다.
여당에 가입을 해서 여당생활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정부여당에 협조하는 단체의 장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보인 박상호씨는 급기야 91년 지방자치제가 부활되면서 1선거구 여당 후보로 섭외가 지속됐다. 여당에서 뿐만 아니라 정보기관에서도 출마를 종용하는 등 후보로 굳혀가기에 이르렀다.
고사를 계속하다 후보자 등록 한 달을 앞두고 결국 승낙, 53.5%의 득표율로 당선, 전반기 부의장으로도 활동했다.
도의회 운영으로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지 못했던 박상호씨는 사업체별 책임 경영자를 두고 팩스로 자료를 받아 결재하는 식으로 사업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갑부 빚에 쪼들리는 처지로 전락
결과적으로 도의원으로 활동하던 4년간 사업체는 골병이 들기 시작했고 도의회 활동을 마친 후에는 외환위기까지 겹쳤다. 끝까지 출마를 고사해야 했다는 후회가 남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5%였던 이자가 3배이상 뛰었고 연체이자가 37%까지 뛰었고 금융권도 BIS기준을 맞춘다고 대출회수에 들어가 엎친데 덮친 상황이 되었다.
결국 서당골 관광농원을 사위에게 넘기고 일부 돈을 받아 개인에게 졌던 빚을 모두 정리하고 가업을 잇고 또 그가 33년간 꿈을 실었던 모든 사업체는 금융기관에서 처분토록 최종 부도를 냈다.
부도 후 그는 서당골 농원에서 마음도 춥고 몸도 추운 2년의 세월을 보내며 자연에 순응했고 울화병도 생겼을 법하지만 욕심이란게 다 부질없고 내 것이 없으며 다만 지역에 좋은 작품 만들어 지역에 기여했다는데 만족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갖게 됐다.
박상호씨는 미국으로 피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고사하고 출마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뒷 얘기를 들려줬다.
보은 충청권의 중심 축으로 부상
그는 신행정수도 건설로 보은은 충청권의 중심 축이 될 것이라며 2010년 유입인구에 맞추는 도시계획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고속도로 건설, 청주-보은간 및 대전-보은간 국도 4차선의 확충으로 교통 사각지대에서 사통팔달이 되기 때문에 신행정수도까지 2, 30분 거리에 있어 청정환경을 지닌 보은은 주거공간의 최적지로 각광받을 것이라는 것.
따라서 절대로 공장이 못들어 오도록 하고 주거형 도시계획도 수립해야 한다는 것.
또한 수한 후평사거리에서 말티휴게소 3거리까지 4차선으로 빨리 확장해 이곳을 중심으로 도시계획을 수립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 본분을 찾고 지역현안문제를 제기, 이슈화해서 지역발전을 꾀해야지 표를 의식하는 행동을 하면 안된다며 선출직 공직자들에게 조언을 했다.
이와 함께 보은읍 비룡소 성미정이 있는 산은 후손들이 팔아먹을까봐 일부러 공원구역으로 만들었다며 국도유지건설사무소 옆 장신산과 연결해 공원으로 만들면 좋은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탤런트 전원주와 숙대 국문과 동기로 방송국 PD출신인 부인 정명숙씨와 슬하에 3남1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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