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필남 조기억씨 모자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을 당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애절한 사연들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는 가운데 산외면 장갑1리 조기억(64)씨와 그의 어머니 황필남(92)씨의 사연이 구구절절 하다.그의 아버지는 조기억씨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징용을 가 탄광에서 노무자로 일했다.
그의 어머니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 시숙과 함께 대가족을 이룬 어려운 시집살이 탓에 남편과 애틋한 정도 키울 수가 없었고 또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말을 미처 하기도 전에 징용을 갔고 큰집에서 3살짜리 큰아들을 남편처럼 여기며 시집에서 지냈다.
그리고 해방을 맞았지만 같이 갔던 사람들은 모두 귀환했으나 그의 아버지는 사망했다며 통지만 받았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아버지를 기다렸던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사망소식은 청천벽력이었고 혼자 몸으로 어떻게 아들 둘을 길러야 하는가 두려울 정도로 눈앞이 캄캄했다.
한 장 달랑 남았던 사진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삭혔기 위해 큰 형이 가지고 있었다가 훼손돼 유복자로 태어난 조기억씨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평생을 살고 있다.
친구들에게는 모두 있었던 아버지가 왜 나만 없는가를 서러워하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쳤던 조기억씨는 할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겠다며 때를 써 어머니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머니와 조기억씨와 형은 큰집에서 담을 이웃하고 있는 바로 옆집으로 분가해 따로 살림을 났다.
조기억씨는 산외초등학교만 나오고 형은 속리중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그만두고 어머니를 도와 들일을 해야만 했다. 어버지 몫까지 하며 생계를 도와야만 했다.
그래도 살림은 필 줄 몰랐고 악재는 계속 겹쳐 군대가기 전 결혼을 했던 형은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온 날 부부가 슬하에 6개월짜리 딸 하나를 남겨놓고 함께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
젖도 얻어 먹이며 자식처럼 키운 조카가 중학교 2학년 때 조기억씨는 결혼해 슬하에 2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없는 살림에 자녀들 학교 가르치는 것도 어려워 고등학교까지 가르치는 것도 짐이었는데 모두 공부를 열심히 했고 큰딸은 대학교까지 나와 지금은 직장생활하며 번 돈으로 가정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밭일 아니고는 아예 문밖 출입을 안하고 구티장 몇 번 간 것 외에 아직까지 보은시장 한 번 안가봤고 지금도 경로당 출입을 하지 않는 황필남씨를 그의 며느리 윤선자(52)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오신 어머니가 너무 불쌍하다”며 “시아버지가 강제 징용만 안갔어도 이런 불행은 없을 것 아니겠냐”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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